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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 눅 19:5-6, 2024. 9. 1. 주일 예배 설교

by tat tvam asi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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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눅 19:5-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9월을 맞이하며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신지요? 갈급함과 공허함을 느끼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9월의 이 가을을 맞아, 고요히 나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삶에 어떤 목마름이 있는지 하나님아버지께 나아가 아뢰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9월 첫 주를 맞이하며, 내 마음에게 대화를 걸어 보시기 바랍니다. '새로 다가온 이 가을, 나는 예수님의 도우심으로인해, 마음에 기쁨과 감사와 평안이 충만하구나'를 깊이 느끼는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먼저 삭개오라는 사람은 누구인지 살펴봅시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 근처에서 한 눈먼 사람 바디메오를 고치시고 여리고에 입성하십니다.

 

 18:35 /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그리고 여리고 도시를 다 지날 때까지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리고 고을을 빠져나가려는 시점에서 오늘 말씀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막 빠져나가려던 순간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눅 19:1-2 /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순결하다, 정의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삭개오 부모의 마음은, 이 아이가 자라서 순결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삭개오의 삶은, 부모님의 바램과는 다르게 자기 백성들의 돈을 빼앗아 로마에 바치는 일을 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세금을 거두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이 있죠. 하지만 삭개오는 권력도, 많은 물질도 소유하였으나, 행복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예수님 앞으로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은혜의 기회를 붙드는 사람이 있고, 잡지 못하고 떠나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은혜를 갈급해 하는 사람들" 입니다.

 

 42:1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사슴에게 있어서 시냇물은 생명 그 자체입니다. 사슴이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가면 반드시 그곳에는 사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슴이 물을 먹으려고 시냇물을 찾아가지만 사자가 있는 것을 보고 돌이킵니다. 그런데 사슴이 몇 번 돌이키다가, 더 이상 목마름을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될 때, 자기 목숨과 바꿀 만큼의 목마름이 있을 때, 시냇물을 향하여 돌진합니다.

 

목마른 이 사슴처럼, 은혜를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예수님 찾기를 갈망합니다.  

 

삭개오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사모하듯이 예수님을 사모합니다.

 

눅 19:3 /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그렇습니다. '사모하는 마음' 이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아마 삭개오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많은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으시고, 삭개오라 이름을 지으시면서 나를 향한 사랑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하는 갈망이 마음에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그분을 뵙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삭개오는 선뜻 일어서지를 못합니다. 자신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 성문을 막 빠져나가려는 순간 삭개오가 달려나온 것을 보면, 많이 망설인 끝에 결단하고 예수님 앞에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삭개오! 내 인생에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예수님을 그냥 지나치시게 할 수 없다'는 다급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지나가시는 길가에는 벌써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어,  비집고 들어설 틈도 없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키가 작아 사람들의 장벽에 막히고 맙니다.

그렇게도 간절히 예수님이 보고 싶어서 달려왔건만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이때 삭개오는 어떻게 했습니까?

 

 19:4 /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오늘 나의 삶에 핸디캡이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걸림돌이 아무리 크다 할지도 내가 예수님을 향한 갈급함이 있다면, 반드시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물러서지 않기로 작정을 하였기에, 그 생각은 접었습니다. 삭개오는 고민하다가 길 쪽으로 굽어있는 돌무화가 나무를 보고 그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을에 유명 인사가 버둥대며 나무로 기어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해 봅시다.

그는 자기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나무에 오르듯 세리가 되는 길을 택하였고, 로마 정권의 힘을 빌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것 같았지만 그의 공허를 메우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만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또다시 올라갑니다. 뒤통수가 근질거렸습니다. 틀림없이 수근댈 것이니까요. 그러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사람들이 비웃어도 괜찮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댓가를 지불하더라도 괜찮다...'고 결단합니다.

 

만일 우리 삶에 지금까지보다 훨씬 행복하고 풍요롭고 건강하고 좋은 기적 같은 결과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면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우리의 말을 바꿔야 합니다.

 믿음이란 자신이 바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결단의 모습은, 마치 여리고 초입에서 만났던 소경 바디매오의 결단과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앞이 보이지 않던 맹인이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고 사람들이 말하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며 울부짖었고 사람들에게 방해가 될 정도로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앞서 가는 자들이 맹인을 잠잠하라 꾸짖었습니다.

 

눅 18:39 /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아마도 사람들의 꾸짖는 소리에 주눅이 들어 의기소침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소경 바디메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내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맹인 바디메오의 마음에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라 믿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이 자신의 구주와 주님이 되심을 믿었기에, 돌무화과나무 위를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돌무화과 나무 아래를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나보다 했는데 고개를 들고 삭개오를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눅 19:5-6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자기 귀를 의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시다니!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는지도 궁금하지만, 이렇게 자기 이름을 불러주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자기 집에 오시겠답니다. 이쯤되면 삭개오가 예수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하는지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얼마나 만나고 싶어하시는지, 그리고 알고 싶어하는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십니까? 여러분이 예수님을 알고 싶어하시는 것 보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더 알고 싶어하십니다. 삭개오가 나를 향하신 주님의 좋은 느낌을 그 마음에 느끼기 시작하자, 삭개오의 마음에 생명이 흐르게 됩니다. 삭개오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예수님이 나를 알고 계시는구나...'를 깨달았을 때, 오직 돈 버는 재미 하나로 살았던 삭개오가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돈 버는 재미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삭개오였는데 말입니다. 자신의 꿈을 이룰 만큼 이룬 중년의 문턱에서, 삭개오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봅니다. '이름 값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구나... 돈만 있으면 존경의 대상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구나... 사회적 지위를 얻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것과 행복은 아무런 상관이 없구나...'

그런데 삭개오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무 위에 있던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 머물겠다 말씀하시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삭개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삭개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 삭개오는 나무에서 급히 내려와, 즐거운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합니다. 삭개오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도 우리 밖에 있는 어떤 것들이 우리를 치유해 주거나 우리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고 굳게 믿어 왔을지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돈과 명예와 권력 등이 나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치열하게 살아왔을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마치 삭개오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것이 밖에 있습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에게 어떤 질병이 발생되었다고 한다면, 내면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권능의 성령님에게 고요히 머무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아픔을 느끼는 즉시 병원으로 달려가 치료를 받으려 합니까? 더 나아가, 치료를 받는 과정 속에서도 온통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자신이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며 질병에 끌려가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닥친 문제, 즉 우리의 아픔에만 집중함으로써 오히려 나의 몸과 생각이 질병에 가두어 놓치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질병에 우리를 가두어 놓는다면, 우리는 그 상태를 뒤집을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인 성령의 역사와 치유의 권능을 붙들지 못하여 우리 삶에 기적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날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시 진동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경직된 생각을 다시 뛰게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느낌을 내 마음에 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에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자이신 것을 아셨기 때문이요, 전지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천지간을 가득 채우고 계신 분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권능과 연결 되어 있음을 의식(consciousness)하며 사셨기에, 항상 자신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 받고 호흡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靈)이 무소부재하다는 것은, 사방천지 어디에나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존재하시는  바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 바로 지금 저와 여러분 안에서 함께하시며 역사하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때, 우리 안에 새로운 약동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과 저의 안에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에게 현실이 됩니다. 

'생각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지요!

'이미 다 나았다'는 생각과 아울러, 이미 다 완쾌되어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심상화하며, 거기서 느껴지는 기쁨의 감정을 느끼며 주님 앞에 머무르시면 됩니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언어 중의 하나가, '느낌'과 '감정'의 경험이라고 합니다. 

“동기를 숨기지 말고 진솔하게 요청하고, 이미 응답받았다는 기분에 젖어들어라!”  

<요한복음>의 번역본(요 16:24)에는 바라는 바가 이미 성취되었다는 기분에 흠뻑 젖음으로써 기도에 힘을 부여하라는 것입니다. 

나그함마디문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서, 예수는 의심을 떨쳐내기만 하면 우리가 “산아, 움직여라‘라고 외치면 산도 움직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나의 ‘행위’로 여기면, 기도를 멈출 때 기도의 효과 또한 멈춘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손바닥을 가슴 앞에 모으고 기도문을 외우는 것을 기도로 여긴다면, 기도는 짧은 시간 동안의 경험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발견된 고대 문서들을 보면, 기도는 행위 이상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감정이 기도입니다.

 '낫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불안과 두려움의 느낌을 떨쳐내고,

이미 다 나아서 펄펄 뛰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신을 마음에 그리며 기도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영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신 성령이 예수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26). 성령은 예수의 영, 하늘의 영 그리고 여호와의 영, 하나님의 영이시며, 만유(萬有)를 포괄하는 영이십니다. 전능자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온 인류를 구속하셨으며,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며, 모든 우주 위에도 계시고 우주를 관통해 계시며, 모든 사람 안에도 계시며 하늘과 땅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성령, 그리스도의 영은 진리와 사랑의 영이며, 우리를 해방시키고 용기 있게 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하고 모든 것을 잘 인내하게 해주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예수 자신과 연합시켜 하나님과 본래의 관계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를 신령한 지혜로 채워 이 세상과 우주 만물의 신비와 모든 깊은 신령한 것까지라도 바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인간 본성을 물질적 속박에서 해방시켜 신성으로 환원시키십니다.


​양자의 미세한 세계에서는 주관적인 마음이 객관적인 현실에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곧 물질이 될 수 있다는, 다시 말해 우리가 마음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좋은 느낌을 우리 마음에 품을 수 있을까요? 우리 한 번 같이 연습해볼까요?

 

❚ 먼저 여러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시간이나 시절을 마음에 떠올려 보세요.

나의 삶 속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고, 신나고, 기쁨으로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그 때를 마음에 떠올려 보시는 것입니다.

 

❚ 그 다음으로 방금 마음에 상상한 것이 지금 원하는 상태로 완성되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즉, '내가 지금 가장 건강하고 풍요롭고 천재성을 발휘하며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있는,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무엇을 하겠는가?'를 상상해보고,

 

'내가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를 마음속에 그려보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싶다면 '병 들지 않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행복해 하는 기분에 집중해야 합니다.

 

돈을 가지고 싶다고 하면서, 지금 현재 나에게는 돈이 없다는 것에 온통 마음을 다 쏟는다면,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좋은 느낌이 흐르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의 생명력을 주고, 능력을 주고, 힘을 주는 벨브가 계속 열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오늘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말씀하실 때,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고 했습니다.

 

눅 19:5-6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오늘 우리도 마음에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는 삭개오와 같이 나의 마음에 즐거움과 생명의 밸브를 열어놓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나 자신이 문제에 대한 생각과 부정적인 느낌에 집중하며 두려움과 불안과 분노 속에 갇혀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이 집중하던 부정적인 진동에서 나와,  우리가 원하는 생각을 선택하면서 좋은 기분 안에 머물며 우리의 마음을 권능의 성령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네 집에 머물겠다"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집에 예수님이 머무시게 해야 합니다. 기쁨과 생명과 즐거움 안에 거할 때,  역사가 일어나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눅 19:8 /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산 것이 아니라, 재물과 권력과 자신의 소유를 의지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작은 키를 만회하기 위해서 나무에 올라갔던 것처럼, 로마 정권의 힘으로 오랜 세월 동족의 삿대질과 냉대에도 재물을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방황하던 삭개오가 ‘자신의 공허감에 집중하며 그것을 채우려고 재물에 온통 마음을 쏟았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회복하여, 원망과 증오와 공허의 삶을 청산하고 감사와 기쁨과 나눔과 섬김, 그리고 만족의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을 옥죄던 삶의 패턴을 벗은 삭개오처럼, 우리 안에 함께하시는 성령님께  마음을 모아,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찾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로 지금 이 시간, 우리 다함께 우리 안에 계신 예수의 영, 성령님께 마음을 두고 집중하시기 원합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끝자락에서 예수님을 만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눅 19:9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저주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삭개오가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외로운 사람이었던 삭개오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이 자리에서 다함께 예수님을 붙잡으십시다. 

 

여리고 끝자락에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던 삭개오처럼, 인생의 갈림길에서 다시 예수님 붙드는 가운데 예수님의 참 친구 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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