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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새로 지으심을 받으라, 갈 6:11-16, 갈라디아서 시리즈 설교(28)

by tat tvam asi 2024. 1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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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으심을 받으라

갈 6:11-16          

 

바울의 서신들은 전부 혹은 대부분 바울이 말하면 옆에서 그 말씀을 대필(代筆)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글을 쓰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손이 떨리고 둔해져서라고 보는 성경학자도 있지만, 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아마도 그의 눈병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갈 6:11 /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학자들이 추측하건데, 바울의 눈병의 이유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임하시는 그리스도를 본 까닭이지 않을까 합니다. 찬란한 영광의 그리스도를 본 까닭에 그의 눈이 일시적으로 안보이게 되고, 다메섹으로 들어가 아나니아의 안수로 눈을 다시 보게 되었지만, 아마도 그의 시력에 어려움이 생긴 것 같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눈병으로 불편을 겪은 것도 사실이지만, 또한 눈병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리스도를 만난 흔적( 6:17 참조)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게 되었다고도 ㅗ볼수 있겠지요.

 

바울은 서신들을 통하여 그가 개척하고 사역한 교회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고 가르쳤습니다. 그의 눈병으로 전체 서신을 직접 쓸 수는 없었지만, 서신의 끝 부분은 그가 친히 쓰고자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서신이 바울의 것임을 증명하고 그의 교인들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큰 글자"로 썼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의 눈이 잘 보이지 않았기에 그가 친필로 쓸 때에 글자가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친히 썼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이 친필로 "큰 글자로 썼다"고 함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의 가르침과 권고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상기시켜 주고자 함입니다. 즉 편지의 내용에 대해 바울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갈 6:12 /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억지로 갈라디아 성도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박해를 면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기독교가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단 종파라고 백안시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유대교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단이어야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교가 정당화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주의자들로 지칭되는 이들은 이런 박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유대인들이 싫어하는데, 바울과 같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들에게 할례도 행하지 않고 그들을 형제, 자매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율법을 중요시하는 유대교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를 핍박할 거리를 더 제공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런 핍박을 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그리고 가능하다면 할례나 절기와 같은 율법의 요소들을 지킴으로써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입니다한 마디로 말하자면,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 성도들에게 그토록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영적인 이유도신앙적인 이유도 아니라는 말입니다오직 자신들이 유대교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받는 것을 면하고 싶고더 나아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그 안에 속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을 강조하는 이들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것도 아니었어요. 앞서서 간접적으로 이 부분을 말하던 바울은 이제 직접적으로 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임을 밝힙니다.

 

 6:13 /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자기들도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껏 눈에 보이고 잘 드러나는 할례와 절기만을 간신히 지킬 뿐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육체를 자랑하기 위해 할례를 강조하는 것뿐입니다. 이들은 할례의 우월함을 강조함으로서 스스로를 높이고 있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유대인으로, 난 지 8일 만에 할례받은 자신들이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겸손하셨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이런 자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분명하게 전합니다.

 

 6:14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이 붙들고 있던 모든 이력들, 소위 세상적 스펙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바울은 자신을 구원하고 살린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유대교의 눈치나 보고 있고, 율법에 사로잡혀 할례 받는 것을 무슨 엄청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6:15 /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오히려 이런 것은 너무나도 무의미한 논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실로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입니다.

 

새로 지음을 받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에,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고 우리의 중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그리스도 의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납니다. '그리스도는 내 안에'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과 하나이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나를 통하여 온 세상으로 퍼진다."이렇게 자기 자신을 예수님과 하나 된 자로 여기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예수와 하나인 자로 보면 생명 세계에서는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되기 위해서, 거듭나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6:16 /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과 긍휼이 있음을 말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 규례'란 무엇일까요? 형식주의자들, 율법주의자들이 말하는 할례를 행하고, 절기를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겠지요!

바울은 형식뿐인 그들의 모습을 계속해서 비판해 왔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 규례'란, 갈라디아서를 통해 바울이 계속해서 주장해 온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의 일부분, 그러니까 할례와 절기만을 강조하는 어설픈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그 본질이 실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규례를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참된 평강과 긍휼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성령님을 바람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3:8 /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도 여러분! 바람은 자유의 상징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바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께서는 왜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을까요?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임의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람이 그 누구에게 매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님 또한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후 3:17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처럼 참 자유는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영이 계신 곳이 어디일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함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살펴볼까요?

 

※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은 자신의 독톡한 존재를 위해 어떤 다른 존재나 실체에 의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며 처음과 마지막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무한하고 영원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흐름 속에 계시지 않고,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주 안에 계시고, 우주가 하나님 안에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크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더 크신 분이다.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한한 공간을 거쳐 존재하신다.
렘 24:24 “ ...내가 하늘과 땅 어디에나 있는 줄을 모르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즉 하나님은 어디든 존재하시고 모든 곳에서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내부로부터 우주를 관통하여 우주에 영향력을 행사하신다.

동시에 우주의 운명에 관여하며 우주의 과정과 고난에 참여하신다.
하나님은 우주를 관통하고(through) 넘어선다.

하나님은 모든 유한한 존재의 구조와 과정을 당신의 무한성 안에 다 끌어안으신다.
어디든 존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을 아신다.

과거건, 미래건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영원한 지금’이기에,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아신다.
하나님은 그의 현존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한계가 없으시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팔과 강한 손과 높은 오른손’을 갖고 계신다.

종합해 보면,

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ⅱ) 하나님은 편재(遍在, 널리 퍼져 있음)
ⅲ) 하나님은 전지(全知)하신 분이다.
       ▸사물과 현상의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 →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
ⅳ) 하나님은 전능(全能) 하신 분이다.  
       ▸어떤 일에나 못함이 없이 능하시다.
       ▸모든 일을 다 행할 수 있으시다 → 하나님의 적극적인 품성
                                                                      ⇩
       이런 하나님께서, '나'의 안에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

 

 

온 우주 어느 곳이나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성령님께서, 바로 지금 여러분과 제 안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참된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하나님의 참된 평강과 긍휼이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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