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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반사

'서울과 평양의 3⸳1 운동‘ 을 고찰한 그 특별한 시간, 2019 감리교신학대학원 '구약이해' 과제

by tat tvam asi 2024.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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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 ‘서울과 평양의 31운동특별전(特別展) 방문보고서(訪問報告書)

 

구약이해강의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주시는 이환진교수님의 배려로, 참 유익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전을 돌아보기 전() 교수님께서 해 주신 설명 중에, “일제 강점기 때, 출애굽기와 요한계시록을 못 읽게 했어요...”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출애굽기의 관점(觀點)에서 31운동을 고찰(考察)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

 

2시까지 기다리면 해설을 해주는 분이 직접 나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획전을 보며 기다렸다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듣게 되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모든 자료는 한국에 있는 것이라고 하며, 이북에서는 31운동을 중요시여기지 않는다는 설명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이북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고 합니다. “남조선에는 김일성 같은 중요한 분이 안 계셔서, 31운동이 실패했다라고...

 

해설자는 선언문(宣言文)의 원문 복사본과 대한독립선언서, 대한국민의회 독립선언서 복사본을 나누어 주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 "31운동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도 한다. 1910년 이래 한국은 일본의 조선총독부 통치하에 놓여 있었는데,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항일독립투쟁은 각지에 의병(義兵)을 낳고 널리 민족계몽운동으로 발전하여 갔다. 일본은 이와 같은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항일독립운동 투사들을 학살 ·투옥하고, 일체의 결사와 언론활동을 금지하였다. 교육정책에 있어서도, 우민정책을 실시하여 민족의식의 성장을 억누르고, 고도의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박탈하였다.

 

이러한 무단정치는 한국의 고유문화를 말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지 ·광산 ·철도 ·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을 독점 경영하였으며, 한민족의 경제발전마저 극도로 제한하였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해외로 망명하고, 특히 무력투쟁으로 혹은 외교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선두에 섰다. 한편 국내의 대다수 농민들은 소작농(小作農) ·화전민(火田民) 등으로 전락하였으며, 생활난으로 인하여 만주(滿洲) 등지로 유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폭압은 지식인 ·학생 ·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의 반일감정(反日感情)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일본의 무단정치를 겪고 있을 무렵, 1914년에 일어난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나고, 19181월 미국대통령 윌슨은 14개조로 된 전후(戰後) 처리원칙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였는데, 그 가운데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고 하는, 민족자결(民族自決)의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세계의 피압박민족에 대한 자극제가 되었다. 민족자결주의의 새로운 원칙은 항일투쟁을 계속해오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조류 속에서 1919121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昇遐)하게 되자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이 유포되어 한민족의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하였다.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활동해왔으나 1917스톡홀름만국사회당대회와 뉴욕의 세계약소민족회의 등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였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실존을 보호 받지 못하는 일제 치하로부터 해방을 목말라 하며 끊임없는 저항(抵抗)으로 대응했던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쾌거(快擧), 이집트 바로 왕의 통치로부터의 해방 경험과 광야생활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자유와 실존을 해 주신 야훼와 중첩(重疊)되어 머리 속에 그려졌습니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서명한 조선민족대표 33인 중에 일곱 분이 감리교졸업생이며, 감리회 측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신 박희도전도사님도 감리교 신학교를 2~3학년까지 다니셨다는 교수님의 말씀을 떠올라,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191931일을 기점으로 봉기한 항일 운동이라는 민족사적 의미감리교를 비롯한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한 기독교민족운동이라는 교회사적 의미를 지닌 31운동에 대해, 아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31운동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인 동시에 신앙의 신념에서 나오는 종교행위이기도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세시위의 확산과 감리교회의 수난도 들여다 볼 수 있었습니다. 3·1운동에서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와 3·1운동 이후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이 어떠하였는지도 살펴보는 기회를 가져 보았습니다.

 

기독교운동의 양상이 다음과 같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째, 3·1운동 이후 기독교의 민족운동은 독립적인 활동보다는 해외 독립운동단체와 연계하는 형태를 띠었습니다.

 

둘째, 3·1운동 이후 교회 여성들도 보다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셋째, 여성들의 독립만세운동과 이후 계속된 상해임시정부 지원 사업, 군자금 모금, 투옥인사 지원은 감리교를 비롯한 한국 기독교 민족주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기독교의 민족주의는 3·1운동을 거치면서 감리교를 비롯한 기독교의 주된 성향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는 1920년대 문화운동, 농촌계몽운동과 실력양상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적극화하는 이념과 신념으로 작용했습니다.

3·1운동 당시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기독교 교세가 감소되고, 목사 전도사 장로 등 교회 지도자들이 시위와 관련되어 투옥되거나 해외로 망명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지만, 2~3년 후 감리교의 교세는 3·1운동 이전 이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감리교를 비롯한 기독교 내부에는 기독교 민족주의가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근대화와 관련하여 기독교를 구국의 수단으로 수용했던 기독지식인들 가운데 일부는 3·1운동을 실패로 여겨, ‘민족운동은 단순한 시위나 청원 또는 선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극복할 만한 힘을 갖추어야 한다...’는 평가가 있기도 하고, ‘기독지식인들은 3.1운동을 통해 드러난 기독교적 대외인식의 한계에 실망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기획 자료들과 해설자의 설명을 정리하는 중에, 성경에 기록된 출애굽기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을 손에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은 불의한 기존 사회 질서, 왕정 통치를 거부하면서 시작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항 정신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이끌어가는 토대가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매 시대 예언자들의 저항,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의 묵시문학적 저항 정신이 그러했다는 것도 상기하였습니다. 바로 이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어진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깨달음을 얻은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하여 충성과 결단을 해야 할 시점에 달했다고 느껴졌습니다. 여러 측면으로 믿음을 정의할 수 있겠지만, 출애굽 관점으로 31운동을 바라본 나의 믿음은 다음과 같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음 = 종교적인 선택 = 정치적인 선택 = 충성과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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