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을 얻게 하리라
요 3:14-15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광야 생활 마지막 해인 40년 째를 맞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가데스에 모여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에돔 왕은 많은 군대를 끌고와 이스라엘이 앞으로 나아기지 못하도록 길을 가로막습니다(민 20:14-21). 모세는 하는 수 없이 지름길을 포기하고 우회합니다. 200만 명 정도 되는 백성들이 아이들과 가축들을 이끌고 또 다시 광야 험한 길로 진행하게 되자, 결국 누적된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민 21:4-5 /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느냐? 이 광야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 먹을 것도 없다. 마실 것도 없다. 이 보잘 것 없는 음식은 이제 진저리가 난다” 불만을 토로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어 죽게 하십니다. 이집트의 노예정책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착취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튼튼한 후손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시절 먹으면 얼마나 잘 먹었겠습니까?
결국 독뱀은 다른 곳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난 불신과 불신앙입니다. 이처럼 독뱀으로 말미암아 불신과 불신앙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현실의 삶에서 불평과 절망하다 죽고 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뱀으로 인하여 죽게 되자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령을 내려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게 합니다.
그리고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은 독뱀으로 인하여 발생한 모든 질병과 상처로부터 깨끗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민 21:8-9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오늘 우리들도 세상의 삶으로 말미암아 질병과 삶의 고달픔으로 시달림을 받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이 불뱀이 되어 우리를 죽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도 바라만 보아도 치유될 수 있는 놋뱀이 있어야 합니다. 독뱀으로 상징되는 ‘죄’로 인해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놋뱀으로 상징되는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의 관원 니고데모를 만나 대화하시며 이 사건에 대하여 말씀을 주십니다.
요 3:14-15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의 근원인 마귀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히 2:14 /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죄를 짊어지고 대신 심판을 받으셨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 볼 때 독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독뱀의 독으로 죄로 오염된 우리의 마음을 놋뱀과 같은 주님의 말씀으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이야기 할 때 예수님이 달리신 형틀로만 이해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란 내가 달려야 할 십자가를 차마 달리게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대신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히 10:20 /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가져가시고 대신 우리에게는 용서의 은총과 의롭다 하심의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완전한 사랑과 용서를 이루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동안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하게 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화해의 길, 새로운 산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찢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그럼으로 십자가는 하늘과 땅이 화해하는 장소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는 사건입니다. 그럼으로 놋뱀을 바라본다는 것은 막힌 곳은 열고 닫힌 곳은 뚫고 나가는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기 시작한다는 것은 갈라서고 나뉘어 진 것을 다시 모이고, 하나되어 화해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십자가는 십자가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십자가는 부활로 이어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십자가가 아니라 그 속에 부활을 잉태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신비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마 20:19 /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가 끝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후 낙심하고 엠마오로 낙향합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낙심하여 갈리리 바다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부활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럼으로 놋뱀을 바라보라는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이 사랑과 또한 십자가를 넘어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아니다, 요 1:19-28, 요한복음 시리즈 설교(5) (0) | 2024.09.14 |
---|---|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삶, 갈 2:17-21, 갈라디아서 시리즈 설교(9) (0) | 2024.09.14 |
웨슬리 설교 40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을 고찰한, 그 특별한 시간 (Ⅹ) (2) | 2024.09.11 |
웨슬리 설교 14 '신자의 회개‘(The Repentance of Believers)를 고찰한, 그 특별한 시간 (Ⅸ) (1) | 2024.09.11 |
웨슬리 설교 18 '신생의 표적‘(The Marks of New Birth)을 고찰한, 그 특별한 시간 (Ⅷ) (0) | 2024.09.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