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4:5-9 /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 개인 이기주의
개인 이기주의는 무엇일까요? 쉽게 말해 ‘내 것은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의 것은 그렇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인간에 숨어 있는 이기주의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늘 존재해 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요나의 이야기 속에도 이러한 개인 이기주의가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님께서 바라고 원하시는 것을 다시 깨닫는 시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2. 박넝쿨을 사랑한 남자
오늘 이야기를 보면 요나가 니느웨가 무너질까 궁금해 하며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요나는 니느웨를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요나는 니누웨 성이 멸망하기만을 바랬습니다.
둘째로,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니누웨성이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성읍 동쪽에 앉아 스스로를 위한 초막을 짓습니다.
욘 4:5 /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쉽게 말해 극장에서 편하게 앉아 영화를 보듯이 먼발치에서 초막을 지어 관람자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부터 하나님의 교육이 시작됩니다.
욘 4:6 /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요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박넝쿨은 잘 아시다시피 잎이 넓은 식물입니다. 그리고 박넝쿨은 뜨거운 해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우리나라의 여름 날씨와는 다르게 니누웨 지역은 습도가 낮아 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그늘에 있으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기에 박넝쿨이 주는 효과는 매우 대단했습니다. 박넝쿨로 인하여 요나의 머리를 그늘이 지게 하여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심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요나는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요나가 박넝쿨을 보고 기뻐하였던 이유는 그의 시원함도 있었겠지만, 다른 이유는 요나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각대로 일을 처리해 주실 것이라 오해한 면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박넝쿨이 하루 만에 자라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그리고 더욱이 하루만에 박넝쿨을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자신의 편을 들어주실 것이라 기대감을 갖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욘 4:7 /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욘 4:8 /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7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벌레를 준비하셔서 이튿날 새벽에 박넝쿨을 모조리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셔서 그것이 아예 없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요나의 예상과는 어긋납니다.
갑작스럽게 박넝쿨을 잃어버린 요나는 어떻게 하나님께 이야기합니까? 그는 스스로 죽기를 간구했고, 심지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러한 요나의 모습을 ‘고질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무슨 일만 터지만, 그것도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죽겠다고 계속 이야기하는데, 어찌 고질병이 아니겠습니까?
이 때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바로 9절입니다.
욘 4:9 /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요나는 하나님께 성을 내고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물어보시는 하나님의 질문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은 다른 나라나 다른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나에게 향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관심이 늘 자기주관적인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나에게 물으시는 질문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로 우리도 성내는 것이 옳은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나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어찌 옳은지 말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 질문에 아주 확고하게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라고 말입니다. 이를 새번역은 더 심각하게 표현했는데,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왜 요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정답은 하나입니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개인주의, 즉 늘 자기주관적 관점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이었던 니느웨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복될 때도 자기관점에서 그것을 이해했고, 오늘 우리가 보는 박넝쿨사건 역시 자기에게 좋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이러함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으며, 올바른 이해를 지닌 선지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옳은 관점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계획과 방법을 간구함으로 그렇게 맞추어 나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요나와 같은 마음이 있다면 다시 주님의 뜻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자녀와 백성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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