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에게 있어 ‘신생(거듭남)이라는 주제는 1738년 5월 24일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올더스게이트 체험 이후 웨슬리는 신생(거듭남)의 사건을 이전과는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웨슬리는 원래 성공회의 가르침을 따라 거듭남=세례로 이해했었다. 이것은 그가 거듭남을 일종의 교회의 의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이런 관점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았다. 그에게 있어 거듭남은 더 이상 물세례라는 교회의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실제로 변화되는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웨슬리에게 있어서 거듭남이란 죄책과 죄의 영향력에서 해방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을 누릴 실질적 힘을 부여 받는 사건이요, 그 열매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이들이 맺게 되는 열매들과 다르지 않은, 믿음 소망 사랑의 사건으로 이해된 것이다.
성경 본문에 ‘성령으로 난 자’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거듭난 자’요 ‘양자의 영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께로 난 자’이다. 성경은 설령으로 난 자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요 3:3).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 다 할지라도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것과 같고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것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 본문은 우리가 임의로 부는 바람의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자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성경에는 성령으로 난 자, 곧 거듭난 자의 표적에 대해 말해 주고 있다. 성령으로 난 자 곧 거듭난 자에게는 다 음과 같은 표적들이 나타난다. 첫째 ‘믿음’이다. 성령 안에서 새로 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고(요 1:12),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나는 것이다(갈 3:26).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고 거듭난 자에게 표적으로 드러나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믿음이 아닌 것을 먼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는 사실을 알고 그 사실에 동의하는 것, 신구약성경의 내용을 풍부하게 알고 동의하는 것을 믿음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이 거듭남을 가은하게 하는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기이한 이적을 일으키신다는 사실에 동의한다고 해서 이 또한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마귀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았고 성경도 알았으며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고 기이한 이적 또한 믿었지만 그들은 거듭나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다.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에 관해 이해하고 동의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 마음 안에 역사함으로 일어나 는 ‘심령의 내적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공로로 인해 자신의 죄가 사함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 되었다는 확고한 신뢰’이다. 이 신뢰에 이른 사람은 반드시 자기를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 ‘육체의 신뢰’(빌 3:4)를 전적으로 거부하고, 어떤 형태의 자기의 공로나 자기 의에 의지하지 않으며 잃어버린 자, 불쌍한 영혼, 정죄된 자, 절망에 빠진 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구원에 대한 열망으로 하나님의 은총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났다’고 할 때 언급되는 이 믿음을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동의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심령 가운데 분명하게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이 참된 믿음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열매를 살피는 것이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죄를 이기는 능력을 갖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믿음 안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에 마귀가 그를 만지지도 못한다(요1서 5:18).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내적인 죄도 이긴다. 또한 평안의 열매가 나타난다.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과의 불화에 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늘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죄이다. 이 죄가 깨끗해졌기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성령으로 난 자, 곧 거듭난 자에게 나타나는 두 번째 표적은 ‘소망’이다. 참된 소망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자의 소망이요, 살아 있는 소망이요, 영원한 소망이 된다. 성령으로 난 자, 거듭난 자에게 소망이라는 열매는 있지만 그 소망이 완성될 때까지 애통의 삶은 계속된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결국은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 하나 님의 자녀는 잠시 근심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크게 기뻐한다. 시련의 시간들이 오히려 믿음을 연단시켜 마침내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함으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보혜사 성령께서 이 순례의 길에 동행하시면서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기 때 문이다. 성령께서 함께 하심으로 애통의 삶이 오히려 기쁨의 삶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께 기쁨으로 찬양하게 된다. 이 기쁨을 가진 자에게 이 세상의 그 어떤 고난과 슬픔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한다.
성령으로 난 자, 거듭난 자에게는 사랑이라는 세 번째 표적이 나타난다. 거듭난 자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향해 더욱 깊은 사랑의 갈망을 가지게 된다. 아들의 영이 임할 때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아따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께 더욱 가깝게 되기를 사모하게 된다. 이 상태가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상태이다. 이렇게 주리고 목 마른 하나님의 자녀는 먼저 사랑의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성숙해갈수록 자녀는 일용할 양식이 바로 하나님 자체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 자체가 그들의 기쁨이요 방패요 큰 상급이 되며, 그분 자체가 영혼의 양식이요 음료가 됨을 알고 간절히 그분과 하나 되길 바란다. 이 사랑의 갈증은 놀랍게도 이웃을 사랑함으로 채워지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이웃을 사랑하는 이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영혼, 심지어 우리와 원수 된 이들까지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가장 핵심적인 증거는 이처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의 영이 함께하고 이 영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으로 인도되어 나가기 때문이다.
이 설교문을 읽으며 나 자신에게 먼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는 성령으로 난 자, 거듭난 자인가?’
거듭난 것은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도 아니요, 교회 생활을 오래 해서도 아니요, 긴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해서도 아니다!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이 여전히 죄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여전히 마귀의 자녀일 뿐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자에게는 표적이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거듭나야 한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거듭남의 표적이 내 안에 있는지 살피고, 거듭남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웃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수 있도록 거듭남의 진리를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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