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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웨슬리 설교 45 '신생‘(The New Birth)을 고찰한, 그 특별한 시간 (Ⅶ)

by tat tvam asi 2024.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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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얻어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 이 사람은 하 나님께 용납된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며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신분이 의인이지 실제로 속사람까지 완전히 의인으로 변한 것은 아니다. 의인으로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아직 의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접붙여졌지만 아직 그 포도나무와 온전히 하나를 이룬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의인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우리는 성화라고 부른다. 성화는 신생(新生, 거듭남)’부터 시작된다. 신생은 복음을 믿어 의인이 된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사건이다. 즉 신생(거듭남)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로서 새로 나는 사건인 것이다.

 

웨슬리는 인간이 원죄라는 비극적인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하면서 그 답을 신생(거듭남)’성화(거룩함)’에서 찾았다.

 

참된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우리는 구원이라 한다. 이 구원을 이루는 데 가장 핵심적인 것인 가르침이 칭의거듭남이다.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죄를 사해주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된 사건이고, 거듭남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안에서 타락된 본 성을 새롭게 하여 실제로 하나님 자녀의 품성을 형성해 가는 사건의 시작이다.

 

왜 신생(新生)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 되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완전하게 창조된 인간의 상태가 거듭나지 않으면 인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의 의미는, 첫째 자연적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다. 원래 인간에겐 죽음이 없었고 사물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며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는 자유의지와 순결한 감정을 지녔다. 둘째는 정치적 형상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돌보고 다스리도록 위임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도덕적 형상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사랑거룩함을 의미한다. 하나님 께 충만했던 의와 거룩함이 인간에게 그대로 주어진 것이다.

 

앞의 두 형상들은 하나님의 형상에 내포된 내적인 특성들이라 할 수 있지만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데 필수적인 관계적 특성이다. 즉 본래적 인간은 사랑과 의와 거룩함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데, 그런 의미에서 이 형상은 세 가지 형상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다"(1:31)고 기뻐하신 이 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안에 사랑과 의와 거룩함이 충만함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아 상상할 수 없는 능력을 부여 받았다 할지라도 피조물의 자리를 넘을 수는 없었다. 이 말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 받은 존재이긴 했지만 변화 불가능한 영원한 존재는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전제하에서만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고 친히 경고를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상태에 자족하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실과를 먹고 말았다. 이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를 이탈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깨뜨림으로써, 인간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형상 은 파괴되고 말았다. 그럼으로 인해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미암았던 모든 특권이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도덕적 형상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하나님의 형상이 사라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마귀의 형상이었다. 마귀의 현상은 인간 안에 교만과 아집과 피조물을 향한 집착이라는 죄의 굴레를 새겨버린 것이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의와 거룩함을 완전히 상실하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 영혼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분리되는 영원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같은 삶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서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근본부터 완전히 새롭게 해 야 한다. 완전하고도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마귀의 형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전환되지 않고서는, 행복은 결코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거듭남이 없이는 이 땅에서의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듭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거듭남의 사건은 영적인 사건으로써,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이루시는 하늘의 사건이다. 이 거듭남의 사건은 칭의,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는 일은 죄 사함을 받은 자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다. 죄 사함을 받은 자에게 칭의와 신생(거듭남)의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죄 사함과 칭의의 축복이 부어지고, 이것이 곧 신생(거듭남)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생(거듭남)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새로 살리시는 생명의 사역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사건인 것이다. 이는 인간이 죄와 허물로 인해 영원한 사망의 골짜기에 누워 있을 때 하나 님께서 그 영혼 안에 새 생명을 부어주심으로 의의 생명으로 이끈 사건으로써, 영혼 안에 일어나는 실제적인 벼화의 사건이다. 즉 인간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이로 인해 참된 의와 참된 거룩함 안에 거하게 되는 사건이다. 거둡남은 세상 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마음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아가 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살아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성장은 거룩함이 완성되는 과정이다. 거룩함이란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이요 온전한 그리스도의 마음이며 모든 하늘 성품이다. 거듭남은 바로 이 거룩함의 시작이요 전제이다. 이렇게 거듭남으로 시작되는 거룩함의 역사는 완 성에 이를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이 완성은 하나님을 온 뭄과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으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한다.

 

이렇게 온전한 거룩함에 이를 때, 달리 표현하면 심령이 청결해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를 누리고 천국이 그의 것이 된다.

 

신생(거듭남)은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생(거듭남)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을 상대에게 예의르 지키고 그를 존중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랑한다면 거듭나라고 외쳐야 한다.

 

세례를 내세워 거듭남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선한 일을 하는 이들에게도 종교인의 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거듭나라"고 외쳐야 한다. 거듭남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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