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 13:1-6
오늘 본문은 개인적인 슬픔을 노래한 시입니다. 시편 13편을 통해, 슬픔과 고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버림 받은 자의 탄식(1,2절)
1, 2절을 보면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말이 4번 나타납니다.
❚ 시 13:1-2 /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이 말은 현재 이 상황이 견디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 상황이 당장 멈춰져야 하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절망의 상황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다윗을 잊으셨다거나 일부러 숨어 계시는 것은 아니지만(다윗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이 처한 고난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① 어느 때까지입니까? 나를 영원히 잊으셨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여러 가지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로 올려드릴 때에, 평소에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이나,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먼저 아뢰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크게, 그리고 다급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윗은 가장 먼저 자신의 잊힘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 같고 얼굴을 숨기신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복과 은혜가 다윗의 삶에서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깊은 절망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조차 의심스러울 때, '하나님이 내가 믿고 있던 은혜의 하나님일까' 하는 의심이 든 적이 있으십니까? 어려울 때 힘이 되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으며, 가족도 자녀도 더 이상 사랑스럽지 않을 때, 내 안에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그런 때가 있으셨나요? 정도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런 상황을 한 두 번은 겪어 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은 물론이고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린 것 같은 상황입니다.
사람에게 잊힘도 고통스러운데, 하나님께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잊힘이 되는 것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지만, 내 인생과 내 영혼이 하나님께는 없는 것이 되는 셈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잊힘이 된 것과 같은 두려움을 느껴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에게 가장 심각하게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② 어느 때까지 주님의 얼굴을 숨기시겠나이까?
배우나 탤런트, 가수와 같은 연예인들은 팬들의 인기를 먹고 삽니다. 그래서 연예인들에게 인기는 거의 절대적입니다. 인기는 다른 말로 하면 '팬들의 관심'입니다.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던 연예인이 어느 순간 갑자기 팬들이 무관심해지면, 그 연예인은 자신의 인생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고 합니다.
제가 예전에 담임하던 교회에 탈런트와 연극 배우가 몇 분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에 전에는 주인공이었는데, 나이가 먹음에 따라 배역 얻기가 어려워진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에 제일 많이 불안해 하시더라구요. 미장원에 가서 매일 관리를 받는데, 관리를 받지 않으면 배역을 얻기가 어려워 지고, 관리를 받으면 엄청난 비용이 들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쉽게 절망하고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는데,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무관심에 견디기 힘든 고통이 수반되었겠지요.
❚ 민 6:25-26 /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얼굴을 보이신다 함은,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에게 은혜와 평강 베푸심을 의미합니다.
❚ 신 31:18 /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외면하여 얼굴을 돌리심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에게 징계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자신이 부지불식간에라도 하나님 앞에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은 아닌가 살피는 것입니다.
③ 어느 때까지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 마음에 근심하리이까?
물론 성경에 다윗의 상황이 어떤지 설명되어 있지 않아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영혼'은 '한 인격 전체'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번민(煩悶)'의 우리말 의미는 '괴로움'입니다.
지금 다윗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생각이 수 천 수 만 가지인 것입니다. '이렇게'하려고 하면 '저렇게'에 문제가 생기고, '저쪽'을 생각하면, ‘이쪽’에 큰 구멍이 나고, 이쪽을 막으면, 저쪽은 다 내어줘야 하고..... 등등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음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영혼이 번민하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은 마음에 큰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고통스럽습니다. 더욱 다윗을 짓눌렀던 것은 그럼에도 그 누구에게 마음을 터놓을 사람도 없고, 하나님은 아스라이 멀리 계신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④ 어느 때까지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리이까?
이 말은 다윗의 원수들이 전쟁에서 다윗을 공격하여 제압하고서 교만을 떨고 있는 듯한 느낌의 표현인데, 그 의미는 아닙니다. 새번역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나의 영혼이 내 앞에서 의기양양한 원수의 꼴을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이 말은 원수들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더 인정받는 위치에 올랐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예수 믿는다고 그렇게 떠들고 다니더니, 이번에도 승진하지 못했어?"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 빠졌을 때 생각이 많아집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보다는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들만 많아집니다. 더 깊은 감정의 수렁에 빠지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이런 상황이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습니다. 정직하게도 내가 지금 이렇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런데 이는 하나님을 알고 믿음이 있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절망의 감정조차도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옵니다. 이 고통이 왜냐고, 어느 때까지냐고 하나님께 물을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서 그치면 안 됩니다. 탄식은 회복으로 가는 시작이어야 합니다.
2. 버림받은 자의 간구(3,4절)
다윗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속성을 의미하는 "여호와"와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내 하나님"으로 그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기에, 그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 시 13:3-4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잊고 계신 것 같은 상황에서, 그는 나를 생각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숨어계시고 귀를 닫고 계신 것 같은 상황에서 응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근심할 때 그냥 두지 마시고 눈을 밝혀주시고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다윗이, 하나님께 자기를 주목하여 보시고 응답해 주시기를 간구할 뿐 아니라, 자기 눈을 밝혀 주시기를 요청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망의 잠', 그 표면적 의미는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요, 실제적 의미는 '영적인 죽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지금 겪고 있는 삶의 무게와 고통이 죽음을 느끼게 할 만큼 무겁고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다윗은 이러한 암울한 상태가 계속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고, 급기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서,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사는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이를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원수들이 이겼다 할까, 대적들이 기뻐할까 두렵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의 두려움은 단지 자신이 패배당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에 이렇게 외치고 나아갔습니다.
❚ 사 17:45 /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다윗은 골리앗이 모욕했던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원수들이 이겼다 할까'에 고민과 '대적들이 기뻐할까'에 대한 두려움은 상황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면서 염려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죽음 자체는 다윗에게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염려는 악인이 득세하는 것입니다. 정의가 무너지는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이 땅에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바라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3. 버림 받은 자의 찬송(5,6절)
5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증거합니다.
❚ 시 13:5 /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성경에서 "오직"이라는 말은 앞의 내용과 반대의 의미를 가질 때 사용되기도입니다. 지금 상황이 어떻든지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이 좋지 않을 때 "그래서 나는"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이 환경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환경에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결정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환경을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환경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숨어 계신 것 같고 환경이 나를 몰아가지만, 다윗은 오직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의 삶에서 궁극적으로 건져 올려주실 것을 자기 마음이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자신을 의지하려고 할 때는 눌림과 두려움에 사로잡혔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에 의탁하고 나니 기쁨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대적들은 조금만 있으면 자신들이 승리하여 기뻐하고 자랑할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을 뛰어 넘어가 버립니다.
❚ 시 13:6 /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다윗의 탄식과 눌림은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덕(풍성함)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주의 사랑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붙들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변하지 않는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셨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슬픔이 찾아올 때 그 가운데 머무를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탄식을 찬송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특히 가정과 일터 에서 주님을 향하는 노래가 깊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주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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