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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자, 행 4:1-12, 사도행전 시리즈 설교(19)

by tat tvam asi 2024.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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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능력을 바라보자              

행 4:1-12

 

베드로가 능력 있는 설교를 했을 때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하루에 3천 명이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고, 성전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을 일으켰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을,  지난 번 본문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교회가 엄청난 성장을 하던 그 때, 사탄도 아주 정확한 타이밍을 맞춰 강하게 활동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사탄의 공격도 거세진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지키며  기도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며 강하게 나가면, 그렇게 강하게 성령으로 나가는 우리를 사탄이 맞서는 게 아니라 뭔가 빈틈이 없는지를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참 은혜를 받고 변화되려 할 때, 신앙생활이 잘될 때, 기쁨이 충만하고 교회 사역이 잘될 때,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교제도 잘되고 기분도 좋을 때, 사탄이 작은 틈을 노리고 그곳을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작은 약점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 동편 "아름다운 문"이라고 불리는 미문에서 40년 동안 구걸로 살아온 사람을 살리신 사건의 연속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들어가다가 이 사람을 만납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함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그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명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40년 동안 걷지 못하던 그가 벌떡 일어나 걷고 뛰었던 장면의 후편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신통한 능력이 있는 줄을 알고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합니다. 지금 베드로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기회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일어난 첫 번째 핍박은 로마 당국이나 외부의 불신자들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부했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4:1-2 /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여기서 '제사장'이란 성전에서 행하는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사람입니다그리고 ‘성전 맡은 자’란 경비대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로마의 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의하면그는 대제사장 바로 다음 자리인 유대교 서열 제 2위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두개파'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적,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하면 친일파처럼, 사두개파는 로마제국에 붙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기들이 장악한 권력과 부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도 대부분이 사두개파였고, 유대교 서열 2위인 성전 맡은 자도 사두개파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언급된 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은 각각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사실은 다 같은 파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최고위층에 있고 권력을 잡고 있던 실세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권력과 부가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이 가진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은 현실지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이 사람, 40여 년을 걷지 못한 이 사람이 고침을 받아 기뻐 뛰고 노래하고 있다면 내 자식, 내 가족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마땅히 함께 기뻐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교회가 부흥되고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소동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행 4:3-4 /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유대 종교 관습에 따르면 날이 저문 다음에는 죄인을 심문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가 저무니까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 기도시간에 성전 미문으로 들어가다가 나면서부터 다리를 못 쓰던 그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는데, 해질 때까지 두세 시간 정도 말씀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저녁 때가 되어 베드로와 요한이 감옥에 갇혔지만, 갇힌 후에 남자만 오천 명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놀랍습니다. 첫 번째 박해인데 교회는 오히려 부흥했습니다. 그 당시 안 믿던 사람들이 믿어서 부흥을 한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이 꼭 무섭고 두렵고 나쁜 것이 아님을 여기서 봅니다. 내가 없어도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꼭 내가 해야 되는 게 아닙니다. 잡혀가도 하나님은 부흥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베드로와 요한을 심문합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라고 질문합니다.

 

4:5-7 /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대부분 바리새파인데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정치와 타협하면 안 된다고 하며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그리고 안나스와 가야바와 제사장들은 사두개인들입니다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같이 모여 있습니다평소에는 두 지파가 원수처럼 지냈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전 문 앞에서 다리 못쓰던 사람이 일어난 사건을 들어서 압니다.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메시지의 핵심은 자기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전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 메시지를 들은 청중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해서 남자만 5천 명이 믿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비상대책회의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모였습니까? 첫째는, 시기심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도들이 나면서부터 다리 못쓰던 사람을 고친 것 같은 큰 기적을 베풀어 사람들이 구름 떼같이 모인 그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게다가 베드로가 말씀을 가르치는데 백성들이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기적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어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조작과 조종에 능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까지 올라와서 기득권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조작해서 모략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무너뜨리고서 자기가 올라가려는 흑색선전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들의 질문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왜 까불어?'라는 겁니다. 마치 조폭들이 '우리 구역에서 누구 허락 받고 장사 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보통 사람이면 굉장히 위축되고 겁에 질릴 상황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전에 도망갔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변화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렵고 떨리는 순간에,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람인가, 아닌가입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 아무 말도 못할 텐데, 베드로의 비결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대답을 합니다.

 

4:8-9 /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첫째는, 능력의 이름, 예수 이름의 권세로 고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병자가 고침을 받아 너희 앞에 서 있다고 담대히 말합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는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병자를 고치는 능력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행 4:10 /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행 4:11-12 /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처음부터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한 복음 전도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그들은 무서워 떨며 도망하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리켜 '제자의 길을 걷는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을 걷는 중에, 벼랑끝에 서게 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문제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문제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볼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와 요한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하고 난 뒤, 이제는 문제보다 크신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문제보다 크신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권능의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벼랑 끝에 서게 될 때, 바로 그곳에서 오직 전지전능하신 예수의 영, 성령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들이 겪는 수많은 어려움도, 결국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하심을 바라보게 하는 자리로 이끌기 위하심임을 알 때, 우리는 담대함으로 능히 이겨내어 승전보를 울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우리가 집중하는 곳에서 나타납니다. 도전과 어려움에만 집중하며 살다 보면 인생이 제시하는 축복과 가능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하나님의 에너지를 흩뿌려 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을 선택하느냐, 어떤 감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에게서 퍼져나가는 에너지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공명하며 언제든지 이 에너지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 창조력을 우리에게 이양하셨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말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우리가 집중하는 에너지에 직접적인 반영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무언가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상황의 희생자가 아닌 그것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의 부정적인 말이 우리의 하루 내내 기분을 좌우하게 만들었나요? 교통, 상황, 날씨, 뉴스 등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에너지를 좌우하게 만들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나요? 하지만 여기 강력한 진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외부 세계에 의존하는 것을 바라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에 집중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에너지는 외부 세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매순간 내리는 의식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 안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 어마어마한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 4:23 /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요 14:16-18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베드로와 요한처럼,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성령 충만한 주님의 자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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