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행 3:22-26
1. 귀가 아닌 몸으로 듣는 자
❚ 행 3:22 /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을 받은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장차 올 메시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장차 자기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터인데 그가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들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던 것처럼 메시아를 통해 새로운 법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종이었던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것처럼, 메시아는 죄의 종이었던 인류를 구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이미 왔으며, 그 분이 예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귀로 들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 좀 들어" 라고 하는 것은 "들은 대로 좀 행해"라는 뜻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귀로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귀로 듣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 듣기를 원하십니다.
귀로만 들려진 말씀은 우리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아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살아야 합니다.
들은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며 확실히 믿고, 그 믿은 바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
❚ 행 3:23 /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모세는 이어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멸망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에게 한 말이기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을 정복했던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이리는 의미로,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여호수아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 멸망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역시 멸망할 것임을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을 영접할 때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망의 법인 율법 위에 생명의 법인 성령의 법을 더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 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을 봅시다.
❚ 계 3:1 /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믿음은 행함으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믿음은, 결국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에 편만하게 계시는 예수의 영(靈)이 늘 나를 인도하고 있음을 알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믿음의 에너지를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믿음 선언문을 써보십시오! 그러면 자신 안에서 일깨우는 믿음이 느껴질 것입니다.
저의 믿음 선언문입니다. 책을 읽으며, 기적수업을 보며 기록한 것입니다.
☞ "나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늘 현존하는 사랑의 에너지로 나를 감싸고 계심을 안다. 나는 생각과 행동,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에너지와 연결될 때 무한한 지지와 인도를 받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현실을 창조할 수 있고, 기쁨 속에 살면서 빛을 퍼뜨릴 수 있음을 안다."
나는 하나님과의 깊은 연결을 신뢰하고, 인도 받고 있음을 믿는다!!! 24시간 동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무언가 내면의 생각과 의도, 현실의 일들이 동시적으로 잘 맞물리며 펼쳐진다는 느낌이 들면, 그 순간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고 생각하고 기뻐하자.
혹시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 같다면, 이는 바른 방향으로 가는 길에 잠시 돌아가는 우회로임을 상기하자.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고 지지해 주고 계시다. 그러니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여기자.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용서하고 곧장, 믿음 선언문(나는 하나님과의 연결을 신뢰하고, 인도 받고 있음을 믿는다!!!)으로 돌아가자!
믿음에 의지한다는 생각에 겁이 나거나 무력감이 든다면, '신뢰와 믿음은 심각한 것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자!
영적 연습이 힘들게 애써야 하는 일처럼 느껴지면, 결국 의무적인 노동이 될 뿐이다. 놀이하듯 가볍고 호기심 넘치는 마음으로 영적 여정을 즐길 때 훨씬 더 다양한 동시성을 경험하게 된다! 24시간 동안 자유롭게 지내기를 연습해보자! 하나님과 함께 즐겁고 열린 마음으로 경험을 창조하고, 깊이 음미하자!
마음과 현실에서 만들어내는 혼란에서 벗어나 편안히 쉬는 자유를 만끽해보자! 내면의 휴가를 통해 우리는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을 일시적으로 멈출 수 있다. 언제든 선택하기만 하면 내면의 휴가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휴가를 통해 영혼의 빛을 받아들여 창조적인 에너지를 드러내고 자신이 소망하는 것들과 가까워질 수 있다.
두려움과 혼란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때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스쳐 지나가듯 경험하는 순간의 자유도 매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 순간들은 깜깜한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와도 같다. 빛이 들어오도록 허용하면 할수록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질 것이다. 두려움은 습관이다. 사랑을 새로운 습관으로 만들어가자! 점차 사랑의 습관이 두려움의 압박보다 커지고 강해질 것이다.
이 연습을 매 순간 적용해 보자. 두려움과 불안, 통제 등으로 긴장하기보다 사랑의 흐름 속에 존재하자. 매일 주변인을 사랑스럽게 보겠다고, 생산적인 하루를 보내겠다고, 음식을 음미하며 감사히 먹겠다고 긍정적인 뜻을 품자. 그것만으로도 '이제 지원 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명료한 메시지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다음에는 조급해하지 않고, 즐겁게 지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면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기에, 우리는 자신의 분주한 계획과 통제, 두려움을 놓아버리고 믿음과 흐름 속에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일 길을 닦아두면 된다.
늘 사랑을 선택하자! 그럴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지 않게 된다!!!
하나님과 함께 현실을 창조하며 삶의 여정을 즐기는 것은 굉장한 충만감을 준다. 하나님과 협력하며 사는 태도는 삶 전체를 뒤바꿔놓는다. 그리고 우리는 당장 지금부터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매사를 판단한다.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현재 상황에 투영하고, 과거의 렌즈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판단한다. 이는 '두려움'의 렌즈로 세상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성장 과정에서 권위적인 어머니와 갈등을 겪었다면, 그 때 쌓인 분노를 상사와의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에도 투사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삶이라는 교실에서 만난 스승으로 받아들이면 분리감을 낳는 판단 습관을 치유하고 상황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현재의 순간으로 끌고 오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다시 선택하자!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마치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보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현재의 관계나 만남에 과거를 덧씌우지 않으면 얼마나 자유로워질지 상상해 보자!
과거의 어두운 기억과 경험을 자극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이렇게 기도하자.
"나는 이 사람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를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보면 그들에게 덧씌워 온 잘못된 투사를 거두고, 서로를 갈라놓던 선입견을 놓아버릴 수 있다. 상대방을 과거의 렌즈를 통해 보지 말고, 사랑을 구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자. 판단하는 나 자신도, 내가 판단하고 있는 그 사람도 사실은 모두 다 사랑을 찾고 있음을 기억하자! 그 사람과 우리가 모두 같은 두려움의 쳇바퀴에 사로잡혀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음을 기억하자. 사랑은 이 두려움의 쳇바퀴에서 빠져나가는 탈출구다.
영적 스승들이 인류가 모두 '하나'라고 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똑같은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욕망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사랑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인류는 하나로 연결될 것이다. 이 변화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저마다 세상을 치유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각자의 삶에서 더 많은 일체감을 만들어 낼 때, 우리는 주변에 더 많은 빛을 비추게 된다. 사랑을 선택하고, 일체성을 회복하며 우리의 빛으로 세상을 밝게 비추는 것,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임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신다! 그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우리가 할 일은, 내 안에 영으로 거하시는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깨닫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리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이미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길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되면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세포가 회복되며, 에너지가 확장된다.
사랑을 선택하라!!!!!!!!
양손을 높이 들고 숨을 깊이 들이쉬며 하나님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껴보라~~~ 살아남고자 애쓰는 두려움의 목소리를 잠재우라! 두려움을 믿으면 우주의 사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에 갇혀 사랑과 연결되는 데 애를 먹게 된다. 평생 두려움 속에서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온 우리가 그것을 놓아버리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행복과 평화는 그런 생각들을 놓아버리는 데서 싹튼다. 사랑에 저항하는 태도는 고통을 낳는다. 두려움은 사랑에 저항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기적수업>의 다음 단락을 읽어보자.
"신이 사용해 온 능력을 당신에게 주었다면 그 능력을 이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신이 당신을 창조한 대로 살아가는 것은 거만한 것이 아니다. 진짜 거만한 것은 신이 당신에게 준 힘은 미뤄두고 신의 의도가 아닌 왜소하고 무분별한 소망을 택하는 것이다.
신이 주는 선물은 무한하다. 그 선물이 응답하지 못할 상황은 없고, 그 선물 안에 담긴 은혜로운 빛이 해결하지 못할 문제도 없다."
하루하루,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 존재하고자 최선을 다하자. 잘못될 것이라는 걱정에 사로잡히기보다는 긍정적인 결과를 생각하고, 의심에 빠질 때는 기도하며, 하나님과 깊이 연결되기 위해 내면으로 들어가자. 갈등을 겪을 때면 창조적인 해결책을 찾겠다고 마음먹자. 이런 연습에 전념하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운지가 곧 영적 훈련의 직접적인 표지다.
이제 목표를 내려놓고 희망과 믿음이 앞장서게 하는 법을 배워보자!
대개 목표란, 행복해지려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전이나 꿈, 욕망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기꺼이'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위대한 비전을 마음에 품은 다음, 그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맡기는 것이 핵심이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집착을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행복하게 해줄 어떤 이유를 찾는 대신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믿는 법을 배우자.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우리 앞에 펼쳐진 하루하루는 늘 축하해야 할 새로운 기적을 가져다준다. 우리가 매 순간을 기적으로 인식하겠다고 선택하면 모든 순간이 기적이 된다.
목표와 결과보다는, 자신이 이미 가진 것을 즐기고 기뻐하는 데 초점을 두자. 매일 잠깐 시간을 내어 잘되어 가는 부분에 주목하자. 언젠가 갖게 될 무언가가 아니라, 지금 가진 것에 주의를 기울이라!
우리가 삶에서 이미 즐기고 있는 것에 초점을 두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릴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욕망을 잘라낸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압박감이 사라지면 훨씬 더 많은 사랑과 에너지를 욕망에 쏟을 수 있다. 지금 자신이 가진 것에 초점을 맞추면 원하는 것을 더 창조할 수 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내맡겼는가?!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좋은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믿음이 들 때, 더는 상황을 조종하고 결과를 몰아붙이지 않을 때, 나의 삶을 혼자 다 책임지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보살핌을 신뢰할 때, 통제하려는 욕구에 집착하지 않을 때, 진정으로 내맡긴 것이다.
평온함의 근원은 놓아버리는 것이다. 놓아버림을 실천할 때, 비로소 자신보다 더 큰 힘에 의지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힘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자연히 그 힘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힘과 연결되어, 자신의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존재이다. 힘의 근원으로부터 능력을 받아 빛을 퍼뜨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빛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깨달음이란 인식이지, 변화가 아니다.
삶을 바꾸려면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바꾸고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다. 자신 안의 빛을 받아들이자. 그러면 그 빛이 세상을 밝힐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면의 빛을 믿자. 우리의 신념과 확신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돕는다. 자신의 빛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힘이 생긴다.
바로 지금 자신을 통해 빛나고 있는 사랑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그 빛 안에서 살겠다고 선언하자. 우리를 지금 여기까지 데려다 준 과거의 상처들을 존중하자. 수피 시인 루미는 "상처는 빛이 당신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상처들이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이었음을 믿자. 상처는 우리가 아픔을 사랑으로 마주하고, 이를 통해 내면의 빛을 기억하며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신성이 우리의 삶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 온 상황이 어려웠을지라도, 지금을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보자. 사랑의 빛이 늘 자신을 통해 빛나고 있었음을 기억하며 트라우마와 고통, 두려움을 존중하자. 우리를 통해 사랑의 빛이 빛나고 있다는 진실을 늘 기억하자.
자신 안에 사랑이 흐르도록 마음을 여는 것은 가장 위대한 결단이다. 사랑과 연결되어 삶을 치유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돕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퍼뜨리는 도구가 되자!
두려움과 의심이 아닌 신뢰와 사랑으로 살아갈 때, 팽창하는 에너지가 자신을 통해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힘이 되는 말이 필요할 때 그런 말을 듣게 될 것이고, 우울할 때는 힘이 생길 것이다.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는 동시성의 기적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지지를 받게 될 것이고, 불확실할 때도 안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
다시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3.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 행 3:24 /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모세와 사무엘 사이에는 이렇다 할 선지자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모세 이후 두드러진 첫 선지자였던 사무엘 역시 메시아의 도래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무엘하 7장 13절은 다윗의 집안에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고 있는데, 다윗 집안의 왕위는 BC 586년에 이미 종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왕권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영원히 설 것이므로 결국 예언은 성취되어졌습니다. 이후에 이어지는 많은 선지자들 역시 메시아에 대한 언급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모세와 사무엘과 그 외의 많은 선지자들이 이야기한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꼭 집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선천적으로 걷지 못하는 자의 치유로 인해 시작된 베드로의 설교는, 결국 죄로부터 돌이키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은 신체 부자유자는 결국 당시 유대교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화려한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을 하며 먹고 살아야 했던 한 장애인의 삶처럼 당시 유대교는 종교의 화려함 뒤에 주저앉아 있는 영적 장애인이었던 셈입니다. 그 장애인이 자신의 본질적인 장애의 문제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 하루 먹을 금전을 구했던 것처럼, 당시의 유대교는 자신들의 본질적인 장애인 죄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기득권의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며 과연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4. 돌이켜 악함을 버리라
❚ 행 3:25 /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유대인들은 선지자의 자손이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언약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자를 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언약은 유대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에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은 유대인이 아닌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에서 씨는 복수가 아닌 단수입니다. 즉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는 특정한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지요. 그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지요. 그 약속이 성취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예수 안에서 그 구원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을 들어 무엇인가를 얻을까 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올려다 보던 그 걸인의 시선을 멈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정결한 신부의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은과 금으로 하루 먹을 것을 얻은 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의 떡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보내지셨습니다.
❚ 행 3:26 /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라는 표현은 "나중에는 너희가 아닌 다른 이들에게"라는 의미가 됩니다. 과연 복음은 유대인에게 먼저 전해졌으며, 이어서 열방으로 뻗어 나아갔습니다. 베드로는 아직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도행전 10장에 가서야 자신이 한 설교가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주신 구원의 복은 죄를 회개하고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통해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로마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죄로부터의 구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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