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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참된 예배자로 부름 받은 사마리아 여인, 요 4:25-26, 2024. 9. 29. 주일 예배 설교문

by tat tvam asi 2024.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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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예배자로 부름 받은 사마리아 여인

요 4:25-26

 

이번 주에 어떤 성도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한 주간 교회 보수를 위해 온 맘을 쏟고 있는 터라, 그분과도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삶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꺼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목사님! 저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고 싶어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싶어요. 제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 친구도 요즘 하나님을 체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해요. 목사님! 요즘 영성이라는 말을 많이들 하잖아요. 목사님은 영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질문을 받고 깜짝 놀랐어요. 왜냐하면 그 질문을 하신 분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분이 아니셨기 때문이에요.

 

오늘은 ​요한복음 4장의 말씀으로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기 원합니다.

 

요한복음 4장을 읽다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성의 우물가에 가셔서 그 동네의 한 여인에게 물 한 바가지를 청하시는 장면이 나오지요? 수가성 여인은 벌써 오랫동안 아주 힘든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병은 세상이 치료하지 못하는 영혼의 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영혼에 중병이 든 것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드셨어요. 예수님은 그녀의 영혼의 병을 치료해 주시려고 일부러 수가성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육의 목마름과 정신적인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영의 존재이므로 영혼의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어떤 목마름이 있습니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중동 지방은 정오에는 섭씨 40도가 오르내립니다. 예수님은 40도가 오르내리는 뙤약볕에 120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여 야곱의 우물 곁에 도착하시자, ‘그대로’ 앉으셨습니다.

 

요 4:5-7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때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우물은 동네에서 10여 리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 여자는 아무도 없을 때 물을 길으러 우물에 도착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여자에게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물을 좀 달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요 4:9 /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마리아 여자의 대답 속에 마음이 꼬여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사마리아 여인이 삐딱하였던 것은 자신의 상처가 건드려질까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살아왔던 과거의 삶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요 4:13-1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 물'이란 야곱의 우물에서 퍼올린 물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합니다. 즉 세상적인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채울 수 없음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목마름이 단순한 육체적 필요를 넘어서는 것을 뜻하며, 오직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물만이 우리의 영혼을 참으로 만족시킬 수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욕망에 의한 목마름에는 끝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마셔도 목마름이 해소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본문에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에서 ‘마시는’은 계속 마셔도, 충분히 마셔도 계속 목마른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 없으며, 오히려 가지면 가질수록 더욱 많은 것을 갖고 싶어하게 되어있지요.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인간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를 잠시 말씀드려 볼게요. 러시아의 어느 마을에 바흠이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바흠은 100 루블의 값을 주고 산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는 늘 “땅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흠에게 다른 지방에서 온 농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볼가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이 동네 저 동네에서 막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흠은 그 농부에게서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바시키르라는 마을에 가면 1,000 루블만 내면 땅을 마음대로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침에 동네 사람들과 함께 들판에 나가 출발할 장소를 정한 뒤 1,000 루블을 내고 출발해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면서 ‘자기 땅’이라고 표시만 하면 그 땅 전체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바흠은 갖고 있던 땅과 집, 재산을 모두 팔아서 만든 1,000 루블을 들고 바시키르 마을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동네 촌장에게 1,000 루블을 내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아침 일찍 출발했습니다. 출발하는 바흠에게 동네 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한 장소로 돌아와야 합니다. 만일 그 때까지 돌아오지 못한다면 땅도 가질 수 없고 1,000 루블의 돈도 돌려받을 수가 없습니다. 

바흠은 동네 촌장이 하는 말을 듣고 걸음을 서둘렀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멀리 들판을 돌아서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더 많은 땅을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흠은 햇빛이 내리쬐는 들판을 돌아다니며 네 귀퉁이마다 구덩이를 파고 ‘내 땅’이라는 표시를 하다가 해가 막 저물려는 찰나에 간신히 출발지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지친 나머지 출발지에 도착하자마자 피를 토하며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바흠이 숨을 거둔 뒤에 바흠의 하인은 괭이를 들고 바흠의 시신을 묻을 구덩이를 팠습니다. 그 구덩이의 크기는 바흠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단 2m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문제는 환경조건이 아니라 '자신'인 것입니다.

 

 4:15-16 /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이 구절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자신에게 생수를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수는 영생을 주는 물로,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충만함과 만족을 상징합니다. 이 여성은 일상적인 물에 대한 필요보다 더 깊은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예수님께서는 그 갈증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임을 암시하십니다.

이는 신자들에게도 일상의 문제들을 넘어서는 영적 충만이 중요함을 일깨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중에서 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시며 대화를 시작하셨고, 점차 그녀의 삶 속 깊은 문제들을 드러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요청으로, 예수님은 여인의 삶의 진실을 꿰뚫어 보시며 영적 갈증과 해답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요청은 예수님의 통찰력과 사람들의 마음 깊숙이 있는 문제를 치료하고자 하는 그분의 사역 방식을 나타냅니다. 즉 이는 우리가 환경조건을 아무리 바꾸어도 목마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환경조건을 바꾸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 욕망의 목마름을 해소하려 합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예수님과 인격적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데에 있습니다.

 

 4:17 /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에수님은 그녀에게 과거에 다섯 남편이 있었고, 현재 동거하고 있는 남자는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녀의 말을 인정하십니다이는 우리의 진솔한 고백과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과 대화하는 장면에서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주셨을 때 그분이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합니다이처럼 수가성 여인은 자신의 속사정까지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이 사건은 하나님의 메시지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 속에서 역동적으로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4:19 /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아는 지혜와 함께 연합함으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가는 관계로 발전해 갑니다.

 

한 자매가 미장원에서 긴 머리를 짧게 잘랐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귀여워 보여 괜찮았는데, 본인은 너무 속상했던 모양입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매우 속상한 상황이지요. 그래서 머리가 자랄 동안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교회에서 예배 안내를 서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무척이나 속상했습니다. 안내를 설 것이면 모자를 푹 뒤집어쓰고 차량 안내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 안에서 교인들을 안내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아침에 묵상한 말씀이 생각이 났답니다.

 

 37:4 /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여호와를 기뻐하라엄청난 복임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와가 기뻐하는 자가 되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여호와를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니! 예배자가 되는 것이 큰 복임을 깨달았습니다. ‘머리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내가 예배하는 일에 소홀해질 수는 없겠지...’ 하고 그녀는 안내 위원을 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저는 오직 여호와만 기뻐하겠습니다..." 그녀는 안내를 서겠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시종 밝게 웃으며 안내를 서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예뻐 보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미래에 올 메시야가 모든 진리를 밝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도 참된 예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4:25 /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말씀하셨습니다.

 

4: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 여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참 예배자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을 저주받은 여자라고 생각했고 이 마을에서 가장 타락한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보시면서 "너는 왜 그 모양이냐?" 하시지 않고, "네 존재가 내 기쁨이고, 내가 너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우리 자신이 보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왜 그렇게 감격했는가를 아시겠습니까? 그녀는 생전 처음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천사도 감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날개로 얼굴을 가려야 되는데, 하나님이 '나'를 딸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감격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게 만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가장 큰 복 중의 하나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자기 존재의 규명'이, '말할 수 없는 죄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신이 죄의 종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추고 꾸미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왠 일입니까? 예수 안에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타락한 죄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애초에 하나님의 자녀였는데,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우리를 다시 되찾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성질이 무서우며 나약한지 자신은 알기 때문입니다. 교만하던지 열등감 있든지 모두가 짓눌려 지냅니다. 내가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니 남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찬양 - '비 준비 하시니'를 다함께 부른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죄로 인하여서 거짓된 옛 사람인 나를 나 자신으로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내가 속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임을 발견한 이 여인은 자신을 더러운 여자로 보는 마을 사람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전에는 자신을 더러운 여자로 여기는 것이 싫었기에 피했으나이제는 상관없었습니다자기가 스스로 더러운 여자였다고 말할 작정이었습니다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마음은 오히려 감격이 넘쳐났습니다이제 나는 하나님의 딸천상의 공주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죄 속에 살았던 지난 날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고백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면 과거의 나를 드러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감격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거나, 상처, 죄책감, 열등감에 눌려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열어 주셨던 영적인 눈을 자신에게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시 복음 앞에 진리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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