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룻 1:15 /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 1:16 /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할렐루야! 이번 9월은 시작부터 사람들을 무척 분주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강력한 태풍 예고로 마음 졸이며 대비하느라 고생하고, 또 이제는 곧 있을 추석 준비로 다들 바쁘시지요? 태풍이 기존 예상했던 것보다는 그 세력이 훨씬 약화되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만 남부 지방은 피해가 크다고 하니 계속 기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추석, 민족의 대명절로 준비할 것이 많은 이 때에 큰 태풍이 온다고 하여 참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추석이 위협을 받은 일은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코로나라는 큰 국가적, 세계적인 재난으로 인해 여러 차례 모임을 미루고 축소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가 앞당긴 비대면 사회가 이제 우리의 시대가 되었기에 마스크의 습관화부터 시작하여 집 안에서 모든 취미, 운동 여가시간을 즐기는 ‘집콕’ 문화, 재택근무, 배달 활성화, 온라인 교육 등등 우리의 일상이 비대면 방식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코로나에 관해 찾아보다가 참 재미있는 제목의 기사를 하나 읽게 되었는데요, 제목이 "해보니 괜찮네" 코로나 끝나도 계속될 10가지 일상입니다. 그 10가지가 무엇이냐면, ①가정간편식(HMR) ②홈트레이닝 ③마스크 쓰기 ④위생습관 ⑤굿바이 저녁 회식 ⑥재택근무 ⑦작은 결혼식 ⑧실용주의 패션·메이크업 ⑨캠핑 ⑩혼자 놀기입니다. 놀랍게도 4번 위생습관을 제외한 모든 항목이 비대면과 관련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위생습관마저도 불필요한 대화 자제라는 조건이 있으니 일정부분 비대면과 관련이 있겠네요. 우리는 서로 얼굴을 제대로 전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익숙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비대면 방식을 더 편하게 느끼는 경향은 특별히 추석이나 설 같은 가족 대모임을 앞두고 더 강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추석만 되면 갑자기 다친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왜죠? 가족모임에 참석하기 싫은 나이롱 환자들이 발생한다는 웃기고 슬픈 말하자면 웃픈 사연입니다.
위의 이야기들은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개인주의화 되는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얼마 전 목사님 모임에 참석하셨던 담임 목사님이 어떤 이야기를 듣고 오셔서 사역자들에게 문제를 내셨는데 우리 성도님들도 한번 듣고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임에 참석한 한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님이 교회에 카페를 열고 싶어서 다른 카페들은 어떤가하고 살펴보려고 그 근처 카페 2군데를 골라 갔다고 합니다. 안으로 딱 들어가니 젊은 여자 사장이 아주 상냥하게 맞이하는 겁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신가요?”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카페 안에서 아주 환대를 받다가 집으로 갔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그 다음 날 또 방문하니 그 사장이 이 목사님을 기억하고는 “아! 어제 커피 한 잔과 레몬에이드 두 잔 시켰던 분이죠? 어제처럼 커피에 시럽 넣어드릴까요?”라고 말하더랍니다.
자 이게 첫 번째 가게이구요, 두 번째 가게의 상황입니다. 들어갔더니 중년의 남자 사장이 카운터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습니다. 신문을 보느라 손님이 들어왔는데도 신경을 안 쓰고, 인사도 그저 무성의하게 고개만 한번 까딱입니다. 아니 저 주인장이 나한테 화났나 싶을 정도로 무뚝뚝한데, 커피 맛은 또 괜찮길래 그 다음에 또 방문해도 여전히 흥흥 입니다.
이제 문제입니다. 둘 중 어느 카페에 더 사람이 많았을까요? 놀랍게도 두 번째 카페입니다. 목사님 모임에서도, 또 사역자 모임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1번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의 결과를 듣고 다들 놀랐습니다. 왜 사람들은 친절하고 상냥한 주인보다 무뚝뚝한 주인을 선택하였을까요? 정답은 그 주인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카페에는 손님이 한 테이블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바로 그 근처 교인 분들이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데 한편으로는 쓸쓸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지금 세대가 추구하는 개인주의, 탈공동체의 흐름은 교회가 추구하는 가치인 사랑, 헌신, 연합과는 거리가 먼데, 이 간격 속에서 교회는 무엇을 따라야 할까요?
차라리 혼자가 편하다고 생각되는 이 시대 속에서 교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선택해야 합니다. 비대면이 선호되는 이유는 그만큼 사람들이 사랑과 배려가 없는 인간관계에 지쳤음을 나타냅니다. 명절 가족모임에도 불참하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갈 정도로 말입니다. 혼자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사랑에 목마른 것이 오늘의 시대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교회는 참된 사랑의 공동체로 바로서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가장 보통의 사람들을 통하여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룻기의 시대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의 모습은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사기 22장 25절의 말씀입니다.
삿 22:25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시기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통치 이후, 아직 이스라엘이 왕정체제에 들어가기 이전 이스라엘에는 제대로 된 통치자가 없었습니다. 인간 왕도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어두운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에게 극심한 기근이 찾아 왔습니다. 룻기 1장 1절의 말씀입니다.
룻 1:1 /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인도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극심한 기근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기의 뜻대로 사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돌아오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요청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은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자기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약속의 땅을 떠나 이방나라 모압으로 향했습니다. 이 당시 이방 나라들에는 인신 제사와 우상 숭배가 만연하였습니다. 모압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나 엘리멜렉은 더 잘 살아보고자 그곳으로 향하였습니다. 아마 처음 모압으로 갔을 때는 잠시만 기근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두 아들들은 이방여인과 결혼을 하고 거기서 머물게 된지 어느덧 10년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이 가족에게 끔찍한 비극이 찾아 왔습니다. 먼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아들 둘 마저도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룻기는 가장 안타깝고 비극적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먼저 떠나보낸 나오미는 다시 고향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두 며느리를 그 부모의 집으로 돌려보내고자 합니다. 이방인으로 타향살이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인지 알기 때문에 두 며느리, 오르바와 룻이 새출발을 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룻 1:16 /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이 나오미와 함께 있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나오미가 자신에게는 이제 더 이상 소망이 없으니 떠나가라고 청할 정도였으나 룻은 나오미와 함께 하기를 선택하였습니다. 사실 나오미의 말대로 집으로 돌아간 또 다른 며느리 오르바가 세상적으로는 훨씬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당시 여인의 몸으로 남편 없이 살기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시어머니와 며느리만 남은 것을 보고 가족이라고 부르지 않고, 심지어는 나오미 마저도 자신은 늙고 더 이상 룻을 위한 남편감을 낳을 수 없으니 자신을 떠나라고 말하는 그 때, 놀랍게도 이방 여인이었던 룻은 알고 있었습니다. 가족의 연결고리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가족이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혈연관계를 먼저 찾습니다. 그러나 가족을 한 운명공동체로 묶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다면 혈연에 상관없이 우리는 한 가족, 한 공동체로 이어집니다. 룻이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불사하고 거침없이 나오미와의 동행길을 선택한 이유는 남편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그 공동체는 여전히 한 가족이며 깨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의 유무는 혈연에 있지 아니하고 그 마음에 서로를 향한 사랑, 배려, 믿음이 있느냐에서 출발함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인생이 우리의 기대나 소망과는 다르게 펼쳐질 때 그 절망의 한복판에서도 우리는 우리 곁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룻기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한 가정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다른 성경에 비해 굉장히 사소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국가나 민족 단위로 움직이던 다른 책 내용에 비해 룻기는 두 여인의 인생 스토리가 중점으로 나오거든요. 그러나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강렬한 고백과 개인들의 아름다운 믿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룻기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주는 한편,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로 우리 마음을 움직입니다. 룻기의 첫 시작은 비참함이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그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셨습니다. 책이 끝날 때는 나오미와 함께 한 모든 주변인들의 삶이 하나님 은혜로 채워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 4장 14절로 15절 말씀입니다.
룻 4:14 /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룻 4:15 /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룻과 나오미가 받은 축복은 단순히 새 남편, 아들을 얻고 잘 살았다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믿음 안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룻이 이러한 앞날을 알고 나오미를 따랐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룻기 1장 17절을 보면 나오미와 동행하기를 선택하는 룻의 결심을 볼 수 있습니다.
룻 1:17 /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무엇을 보고 죽음의 길을 자처하였을까요? 이방인이었던 룻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음은 그녀가 그동안 함께 생활했던 나오미의 삶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큰 불행 중에서도 며느리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여 자신을 떠날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그동안 자신과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들에게 했던 일들에 대하여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나오미는 이방 땅에서도, 그 죽음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바라보았고, 이에 대해 감사하고 남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귀한 자리에 설 수 있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룻기에는 참 많은 사랑의 순간들,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먼저는 서로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여 조건 없이 함께 하는 룻과 나오미의 사랑입니다. 둘째로는 이방 땅에서 온 여인에게 끊임없이 마음을 쏟는 보아스의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룻기는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사랑을 충족시켜 나갑니다.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 서로를 향한 기원과 축복이 넘치는 사랑입니다. 가족은 이러한 존재입니다. 어려움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 서로를 위하는 마음, 사랑을 추구하는 삶을 함께 이어가는 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사실 룻과 나오미의 사이는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무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에요. 아직까지는 아름다운 미담보다는 험담이 더 많이 나오는 관계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험담할 수 있는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연결고리라는 믿음으로 서로 연합을 추구하는 참된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올 추석, 우리의 선택에 따라, 감정에 따라 추석의 분위기가 결정지어집니다. 배려 없는 말과 행동, 힘든 노동과 갈등들이 추석의 이야기가 된다면 우리는 다 환자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추석을 통해 서로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다시 확인한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가족이 됩니다. 오늘 함께 나눈 룻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길 원합니다.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에서 가족을 만드는 귀한 주의 자녀 되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주님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변함없는 사랑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이번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귀한 자녀 되게 하시고, 주의 사랑 안에서 하나 되게 하여 주세요. 함께함으로 서로를 높이던 룻과 나오미의 모습처럼 우리도 또한 가족을, 교회를, 세상을 그 마음으로 품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내 주변에 그 사랑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 사랑의 통로로 사용하여 주세요. 만일 이 시간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우리 가족 구성원이 있다면 주님께서 그 사랑의 손길로 만져주시고 꼭 잡아주시길 기도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보듬는 사당중앙교회 될 수 있도록 주님 함께하여 주실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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