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로 물러가라
마 16:21-23
21 /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할렐루야! 3월의 첫 날을 예배로 열어 가시는 모든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삼일절이죠. 거리마다 걸린 태극기가 우리들에게 뜻깊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게 합니다. 광복을 위해 개인의 모든 안위를 벗어버리고 목숨을 바쳐 독립을 외친 우리 선조들을 생각하면 감사하고 존경스러운 마음뿐입니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던 35년 간의 시간이 얼마나 처절하고 고통스러웠는지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로 참으로 오랫동안 그 굴레 아래에 놓여있었습니다. 지금도 사실상 경제나 사회 이슈로 서로를 지배하려 하는 정치싸움은 여전합니다. 나라마다, 사람마다 타인의 우위에 서려는 욕심은 시대가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인간의 강한 욕망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욕망의 표출은 역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특별히 19세기는 땅따먹기라 표현될 정도로 많은 열강들이 앞 다투어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차지하기 위해 총력을 다 하였죠. 혹시 이런 뜨거운 식민지배의 열풍이 부는 19-20세기에 식민 지배를 하지도, 당하지도 않은 나라가 총 몇 개국인 줄 아시는 분이 계실까요? 오직 4나라뿐이라고 합니다. 네팔, 에디오피아, 스위스, 태국입니다. 네팔과 스위스는 아시다시피 히말라야와 알프스 같은 높은 산이 있기에 다른 나라가 침범하기 어려웠죠. 따라서 그런 지형적 특성으로 인해 식민지배의 위험을 피했고, 에디오피아와 태국은 영국 프랑스 이태리 등 여러 강대국들 사이에 위치해 있는 지리적 특성상 한 나라가 이 땅을 차지하면 큰 분쟁일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나라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가 없었다면 정말 전세계가 지배와 피지배의 형태 안에 있었을 정도로 각 나라, 각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를 포함한 참으로 많은 국가들이 식민지배로 인해 피해를 보았었는데, 물론 그 아픔이 모두 극심하여 고통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기나긴 괴로움의 시간을 보낸 나라가 있다면 바로 이스라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당한 고난의 세월을 보여줍니다. 먼저는 애굽에서의 430년 간의 종살이가 있었고, 그리고 70년 동안의 바벨론 포로기를 지나 오늘 본문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신약까지 이스라엘이 겪었던 고난의 시간을 말씀을 통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 2:23 /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애 1:1 /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애 1:3 /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눅 2:1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눅 2:2 /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눅 2:3 /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시대마다 각기 다른 강대국에 의해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되고, 식민지가 되었던 이스라엘은 예수님 당시도 로마의 영향력에 속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호적을 명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목적은 세금 징수와 반란 진압이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와 군사력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호적을 명령하고 모든 이가 그 명에 따르는 것을 보아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력이 강력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상 오랜 기간 동안 늘 위험 가운데 놓여있던 이스라엘이 로마에 대항하여 나라의 주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별히 그중에는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3절로 16절의 말씀입니다.
눅 6:13-14 /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눅 6:15-16 /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5절의 말씀에 셀롯이라는 시몬이 등장합니다. 셀롯은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헬라어로 열심, 열정을 뜻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열심당 카나이라고 말합니다. 칼이나 무기로 로마와 전투를 벌이며, 이스라엘 독립에 열심을 낸 사람들) 이들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독립 목표로 하여 격렬하게 무력 저항운동을 펼쳤습니다. 열심당원에 속한 시몬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의 마음에 이스라엘의 독립, 조국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을 예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수제자라 불리는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모든 일에 앞장서며, 주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여 크게 칭찬을 받은 인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오늘의 본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크게 꾸짖으며 그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 외치는 장면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당연한 모습입니다. 독립을 위한 모든 큰 그림, 곧 능력과 권세를 가진 예수님이 이제 곧 로마의 손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자신과 밎 예수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나라의 큰 일꾼이 되어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드는 밑그림이 완성되었는데, 예수님은 예수살렘으로 향할수록 계속 딴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는 결코 이해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광의 순간을 바로 앞에 두고 죽음을 이야기하시다니요!
요즘에는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나 감정을 음식에 비유하여 목이 막히고 답답한 상태를 고구마라 표현하고, 시원하고 통쾌한 상태는 사이다라 이야기하는데, 말하자면 제자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은 사이다 대신 고구마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이지요. 권선징악, 해피엔딩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은 정확히 내려진 답이죠.
우리는 빨리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나와 반대되는 것을 악으로 규정합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꾸짖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선은 바로 무력이나 권력으로 쟁취하는 로마로부터의 독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로마에 대항해야 할 결전의 날이 다가올수록 예수님은 오히려 죽음을 이야기 하시니 제자들의 입장이 어떻겠습니까? 바로 이 지점이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척점, 동상이몽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니편 내편을 나누어 우리 편의 승리를 우선하는 사이다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기에 예수님의 사역은 실패입니다. 유대인들이 꿈꾼 메시아는 군마를 타고 등장하는 전사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어요.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의 생애는 죽음, 그것도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로 끝이 납니다. 사람들은 모두 실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계획은 거기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고,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사 우리를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분노하고,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질까 두려워하며 반대하던 제자들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수치로 여겼던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사로 세상에 전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의 변화된 열심은 섬김과 나눔, 사랑의 삶으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거룩의 추구로 바뀌었습니다.
행 2:36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천 명을 전도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입니다. 나의 열정 가득차서 하나님의 뜻보다 이를 앞세울 때 베드로는 실수하였습니다. 바다에 빠지기도 하고, 예수님을 꾸짖거나 저주하기도 하면서 그 뜨거운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모두 지켜보고 성령으로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이후 베드로는 자신이 가진 열정을 바로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잘 기다리지 못합니다. 내 계획과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것은 실수로 규정하며 빨리 내가 바라는 결론으로 도달하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다그쳤던 것처럼 말입니다.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침묵에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의 방식은 침묵이 아니라 기다림입니다. 우리가 빠른 사이다를 바라는 이유는 그 마음에 내가 추구하는 것이 곧 정답이고 선이라는 맹목적인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결정에 앞서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니다.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고치지 못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막 9:28-29 /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십자가를 앞에 두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기도하시던 겟세마네의 기도가 있습니다.
마 26:39 /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기도는 하나님의 계획에 내가 설득당하는 것이지 내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살피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때로 그 필요가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주시고 우리와 영생의 삶을 나누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모든 것이 사단의 미혹이요, 사람의 욕망임을 깨달은 베드로가 주의 뜻을 먼저 구하여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이끄는 사도로 바로 선 것처럼 오늘 이 말씀 안에서 저와 사랑하는 사당중앙교회 모든 성도님들도 사람을 세우는 어부, 반석 위에 세운 교회 되시길 기도합니다.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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