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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살전 1:2-3, 속장&부속장 헌신예배

by tat tvam asi 2024.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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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살전 1:2-3

 

모든 교회와 성도들이 부흥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회복과 부흥을 외친다고 회복과 부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흥을 위해서는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중, 유럽에 속한 빌립보에서 전도한 후에 다음 선교지로 찾아간 도시가 바로 데살로니가였습니다. 바울은 이 도시에 에베소나 고린도처럼 오래 머문 것은 아니었습니다. 불과 세 번의 안식일을 머물렀다고 하였으니까요.  아마도 20여 일 남짓 데살로니가 교회에 머물러 복음을 전한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행 17:1-2 /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그러나 데살로니가에서 가졌던  짧은 기간 동안의 선교 효과는 대단했고, 그로 인해 아주 큰 영향력 있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잠시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부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속회지도자 여러분과 데살로니가 교회 부흥의 이유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는,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일행은 데살로니가로 가서 3주간 머물며 회당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야손을 비롯하여 몇몇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지역의 사람들이 굉장히 거칠었습니다. 이 지역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것을 시기하였던 유대인들이 불량배를 동원하여 사도 바울이 머물고 있던 야손의 집을 습격했습니다. 이때 마침 바울과 실라가 외출하고 없었으므로 유대인들은 집 주인인 야손을 대신 잡아 읍장에게 끌고 갑니다. 끌려가는 과정에서 야손이 매를 많이 맞았습니다.

 

그리고 야손을 고발합니다.

 

행 17:6-7 /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천하를 어지럽힌다는 말은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고 다른 임금을 섬긴다는 말로 이것은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다른 죄라면 쉽게 풀려날 수 있어도 반역죄라 하면 이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이렇게 하며 선교에 치명적인 방해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악의적으로 날조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야손과 일행은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이들은 믿은 지 3주도 되지 않은 새신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였는데, 바로 이런 극심한 어려움을 당한다면 '예수를 믿으며 살겠다고 결정한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인가' 라고 회의적인 반문을 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야손이 반역이라는 죄명을 쓰고 고발을 당합니다이때 야손은 끌려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사실 끌려가야 할 사람들은 내가 아니라 바울 일행이 끌려가야할 사람들인데...'라는 생각이 왜 들지 않았겠습니까야손은 그들 대신 끌려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야손은 이때 피하려 했다면 얼마든지 피할 길이 있었습니다왜냐하면 지금 유대인들의 목표는 바울과 실라입니다그러므로 바울이 어디 있는지 그 곳을 알려 주면 됩니다그리고 "나는 잘 모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이제 나는 예수를 믿지 않겠소!"라고 말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그런데도 야손과 그 형제들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달게 받았습니다. 야손은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하였을까요?

비록, 예수님을 영접한 지 3주도 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야손은 이 다급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전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영생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야손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자기 살 길을 찾아 갔다면 충분이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야손은 편한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야손은 이 위기의 순간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전도자 사도 바울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가는 곳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겪었을 고난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생명을 전하기 위하여 데살로니가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또한 자신에게까지 전하여 주었는데, 어찌 야손이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 일행을 고자질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야손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주여, 바울 사도 일행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시옵소서."

 

야손은 자기가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재판을 받으면, 바울 일행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손은 이처럼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늘 데살로니가 교회를 생각만 해도 늘 빚진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 전파의 시간이 아주 짧았었고, 게다가 자기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많은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고난 받았던 데살로니가 교회가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을 일 년이 지난 후 전해 들은 바울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살전 1:2-3 /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저는 이것이 성도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혹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야손은 고통스러움으로 인해, 배교하지 않았을까?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러 어려움으로 사라지는 게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사라지기는커녕 데살로니가 교회가 부흥을 한 것입니다.

 

속장, 부속장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야손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의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손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의 사랑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손의 눈물이 기도가 있었습니다.

야손은 바울 일행이 무사히 데살로니가를 빠져나가기를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울대로 야손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많이 울며 위하여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설 수 있었던 이유는 눈물의 기도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속장, 부속장 여러분! 어떤 때는 정말 '내게 주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내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으셨을 것입니다.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나면 훨훨 날 것처럼 자유로울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요? 

 

오늘 주님은, 야손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의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들려 주시며, 바로 '나 자신' 하나하나를 통해 이루고자 원하시는 삶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삶의 첫 관문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의 기도일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간절하고, 사랑하기에 그 대상이 잘되기를 원하고, 사랑하기에 그 대상에 나의 주의를 집중해서 감정을 싣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눈물의 기도를 원하셨을까요?

 

야손이 비록 믿은 지 3주 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바울이 전해준 복음, 즉 예수님 십자가의 속량과 부활의 영광, 그리고 권능의 성령으로 오시어 자신 안에 함께하고 계심을 그 마음에 받은 것을 깊이 깨닫기를 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靈), 부활 승천하시어 다시 오신 예수의 영(靈), 성령(聖靈)께서 자신 안에 함께하고 계심을 아는 야손 자신도 참된 생명의 길을 사랑의 눈물로 걸어가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눈물은 슬플 때만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쁠 때도, 감사할 때도, 감격스러울 때도, 사랑할 때도, 대상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눈에서 주르륵 흐르지요...

 

저는 개인적으로는 어렸을 때 큰 인생의 굴곡 없이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목회하고 나서는 왜 그렇게 어려운 일들이 많은지, 하나부터 열까지 월반하며 그냥 통과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나에게 그냥 지나가지 않게 하였을까' 생각하다 큰 깨달음을 얻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을 가득 실은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구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저 평탄하기만 한 삶속에는 눈물의 기도가 없을 수 있을 테니까요.

 

마 6:31-33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제 예수를 믿었고 십자가 복음을 알았다면 이제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네 문제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주시고는 역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대전제가 있다면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실수하지 않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염려하는 대신, 온 우주만물 삼라만상의 창조주시요 주재자이신 하늘 아버지께 다 맡기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내려놓음 & 내어맡김이 무엇인가를 삶속에서 체험적으로 느끼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때, 사도 바울에게는 사랑과 헌신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의 역사와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눈물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도 자신의 복음 사역 안에 항상 눈물의 기도와 훈계가 있었습니다.  

 

행 20:31 /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오늘 우리 속회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는 속회 지도자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사랑의 결정체인 눈물의 기도로 감당하기 원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속회지도자들의 사랑 자체인 눈물의 기도를 하는 가운데, 권능의 하나님이 활짝 열어가시는 부흥과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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