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행 2:19-21
우리는 지금 신약교회의 시작과 함께 베드로 사도가 최초로 설교한 내용을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 설교의 특징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설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지상사역 기간동안을 다 따라다니면서 목격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나 부활하심을 직접 보고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바를 그대로 증언했습니다.
그가 보고 경험한 것을 그대로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것이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다 성경에서 예언했던 것이며, 그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은 구약성서의 선지자 요엘이 예언한 말씀을 다시 인용한 것입니다. 요엘이 살던 상황은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강대국의 침공 위협으로 시달리는 데다가, 국내적으로는 메뚜기 재앙과 가뭄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지치고 곤고한 때였습니다. 희망과 의욕을 잃어버린 시대였습니다. 예언이 멈추고 환상이 보이지 않고 꿈을 잃어버린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브두엘의 아들 요엘이 희망을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엘에게 말씀하십니다!
❚ 요엘 2:28 /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런데 예언과 환상과 꿈, 이 세 가지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셋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셋 다 지금 있는 일은 아니고 미래지향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미래에 이루길 원하는 일이 있다면, 오늘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행 2:19-20 /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오늘 본문의 말씀이 좀 무겁게 들리지요! 하늘에는 기사가 나타나고 땅에서는 징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피와 불과 연기라고 했습니다. 또 해가 변하여 어두움이 되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는 무시무시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나는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날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직전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런데 징조와 예언의 주된 사건의 관계는 징조가 먼저 일어나고 예언의 주된 사건이 나중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예언을 선포하고 나서 언제 이 일이 이루어집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이루어집니다.
요한계시록 9장을 보면 6번째 나팔을 불게 되면 유브라데강에 결박된 네 천사가 놓여지고, 그들은 사람 1/3을 죽입니다. 네 천사와 이만 만의 마병대 천사가 죽이는 살인도구가 불, 연기, 유황입니다.
❚ 계 9:14-18 /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준비된 자들이더라 ...
이 세 재앙 곧 자기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말미암아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하니라
그런데 구약성경 예레미야서를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불이요 악한 백성은 나무이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악한 백성을 심판하는 것을 불이 나무를 불사른다고 표현했습니다.
❚ 렘 5:14 /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을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을 나무가 되게 하여 불사르리라
이것이 사도행전 2장 19절에 예언된 피와 불과 연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승리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 행 2:21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죄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고 형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에서, 그 형벌에서 구원을 받는 길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주여, 주여" 라고 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 의미를 알고 바르게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라고 하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의 심판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살려달라고 부르는 그런 부름이 아닙니다. 미리 주님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자기들 스스로 최초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이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창 4:25-26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다시 아담에게 아들을 주셨는데 그 이름이 '셋'입니다. 셋이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경건한 후손인 셋이 아들을 낳았는데 왜 하필이면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에노스라고 지었을까요?
그들은 인생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셋은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시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이름을 불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생은 죽는다는 것을 다 압니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인 것이지요. 삶과 죽음은 영원에 잇대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참 모습의 근원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보다 훨씬 밝고 광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인 '영(靈)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깨달아 괴로움과 고통의 원인은 에고를 잠재우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오감의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자유와 풍요를 구가하는 삶으로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그 길은 바깥으로 멀리 뻗어 있지 않습니다. 그 길은 거짓된 에고에 더 이상 속지 않고 진정한 '나'(I AM)에게로 돌아가 안기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과 안녕을 '보이지 않는 무한대의 근원'이신 예수 위에 집짓는 일입니다.
2)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 행 4:12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름에는 힘이 있습니다. 자기 암시 능력이 있지요. 그래서 이름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 마 1:21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성서에서 구원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 우리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
♥ 눈먼 사람들에게 시력이 회복되는 것
♥ 깨달음
♥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
♥ 유배 상태에서 다시 되돌아가는 것
♥ 우리의 질병이 치유되는 것
♥ 음식과 마실 것
♥ 죽은 사람들의 땅에서부터 부활하는 것
♥ 다시 태어나는 것
♥ 하나님을 아는 것
♥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는 것
♥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의롭다고 일컬어지는 것)
구원의 의미들은 예수의 보다 구체적인 이미지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각각의 이미지들은 우리의 문제와 그 해결책을 말해줍니다.
♥ 우리의 어둠 속에서 빛 : 예수는 세상의 빛이다
♥ 우리의 굶주림을 채워주는 것 : 예수는 생명의 빵이다
♥ 우리의 목마름을 가시게 하는 것 : 예수는 생수(生水)다
♥ 길을 발견하는 것 : 예수는 길(the way)이며, 문(the door)이다
♥ 생명의 원천에 연결되는 것 : 예수는 포도나무다
♥ 다시 태어나는 것 : 예수는 죽고 다시 살아나는 길이다
♥ 죽음에서 벗어난 생명 : 예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 치유 : 예수는 우리를 온전케 만드는 분이다
♥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 : 예수는 새로운 성전이다. 비록 예수는 희생제물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많은 시들이 주님의 이름 하면 그 이름을 찬양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 시 8:1 /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 시 63:4 /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이런 찬양을 부르는 것은 나를 구원하신 주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은 문제풀이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애써 문제를 풀어 나가다 보면 문제풀이의 고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인과 법칙, 즉 모든 일은 원인에서 발생한 결과이며, 원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는 법칙이라고 자신의 문제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 사당중앙교회 성도들은 “타인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황금률을 잘 터득하여 어느 정도 달인이 되셨어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들에 둘러싸여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먹고 피부로 느끼는 즉 오감이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해서 아는 세상은 어차피 진짜가 아닌데,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다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지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취하게 되면 우리가 살면서 겪는 문제들을 제대로 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생기는 차원 안에서는 그 문제들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제대로 해결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셨던 예수님처럼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여 '문제를 푼다'는 생각도 없이 문제를 풀어내시는 '진정한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문제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위로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문제가 제대로 보이고, '나'라는 존재는 문제 자체, 즉 생존의 문제, 사랑의 문제,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명예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경험하는 자'임을 깨닫게 되어 예수님처럼 '존재의 새로운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됩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오감의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삶! 그 길은 바깥으로 멀리 뻗어 있지 않습니다. 그 길은 거짓된 에고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도, 거기에 속지도 않는 진정한 ‘나’, 즉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께로부터 생기를 코에 불어넣은 존재의 원형에게로 돌아가 안기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과 평안과 아무 탈 없이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안에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무한한 공급원이 되시는 온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 안겨, 그 안에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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