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의 능력
행 2:22-32
베드로 설교의 두 기둥은 이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너희가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생애와 삶 그리고 죽음
❚ 행 2:22 /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로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의미지요! "너희들은 이미 알고 있지 않니? 나사렛 예수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푸신 것을 말이야... "
베드로 사도는,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심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큰 권능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다리를 못 쓰던 사람이 일어나고, 맹인이 눈을 뜨고, 못 듣던 사람이 귀가 뚫리며 말도 하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고, 귀신도 쫓겨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예수님이 메시아입니다!" 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행 2:23 /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3절을 보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새벽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라고... 그런데 그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고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된 것' 입니다. 즉 예수님은 갑자기 잡혀서 죽은 게 아니라, 미리 알고 계시다가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신 사건이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신비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에 활동했던 이사야가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그리스도를 이미 예언한 것을 여러분은 익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것입니다. 23절 말씀처럼, 십자가는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여기서 "법 없는 자들"이란, 율법이 없는 로마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손에 의해 행해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과 하수인들을 이용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것이지요. 로마인들이 죽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유대인들이 죽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뜻에 의한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사악함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의 부활(24-32절)
❚ 행 2:24 /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그러나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내셨습니다. '고통'은 문자적으로는 산고(産苦)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에서 삶으로 옮기는 새로운 탄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다" 라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 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미 예수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임을 말씀하여 주셨기에, 또한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과 목적에 입각한 것이기에, 더 이상 죽음이 예수님을 무덤에 붙잡아둘 수는 없습니다.
❚ 행 2:25 /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시편 16:8-11, 시편 110:1절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 시 16:8-11 /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 시 110:1 /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핵심은, 이 구절은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 메시아에 대한 예언을 하신 것으로, 성령의 감동하심 가운데 베드로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을 통하여 다윗은, 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행 2:26 /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첫째, 다윗은 '내 마음이 기뻐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기쁜 일만 있겠습니까? 어려운 일을 통과해야 때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고, 오해를 당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주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힘든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윗은 혀도 즐거워했다고 고백합니다.
내 혀도 즐거워했다는 의미는, 다윗은 말을 할 때에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였다는 것입니다. 입의 말로 우리의 감정을 다 드러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다윗은 모든 순간 마다 감사와 기쁨을 노래 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다윗은 '육체도 희망에 거한다'고 합니다.
사실 늙으면 육체는 점점 힘을 잃어 갑니다. 육체는 우리 몸에서 생명이 떠나는 순간 흙이 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우리 육체에 희망이 있다는 말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몸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하다는 의미가 포함됩니다. 죽음 후에도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기에, 희망 속에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이 땅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부활의 능력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도 희망에 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즐거움이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행복이나 즐거움의 핵심은, 내 눈을 만족시키고 내 귀를 만족시키고 내 입을 만족시키고 내 몸을 만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시편 16편 11절을 보겠습니다.
❚ 시 16:11 /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다윗은 생명이 어디에 있다고 하였습니까? 주 앞에, 주의 오른쪽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주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 신앙을 가졌던 다윗의 기쁨입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 주님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아름다움과 광대함이 우리의 개인적인 걱정들을 너무나 작게 만들었던 순간, 혹은 어쩌면 우리 생각들의 소음이 잠잠해지고, 시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고요 속에서 나타났던 순간을 경험해 본적이 있나요?
저는 깊은 묵상 중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염려, 걱정, 두려움, 나의 소원까지 무거움으로 주님 앞에 아뢰고 있을 때, 무한하며 광대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별들을 넘어, 시간을 넘어 내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와 제한이 나의 것이 아님을 그냥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 마음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의 어려움도 실패도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내 인간 경험의 일부이지만 내 진정한 자아의 일부가 아닌 듯했습니다. 나의 영혼은 이러한 것들을 관찰하고 그것들로부터 배우지만 결코 그것들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냥 알아졌습니다.
하나님을 바닷물에 비유해 볼 때, 우리를 그 바다의 한 개위의 물방울이라고 하지요. 그 한 방울의 물 속에는 바다의 속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도 하나님의 신성이 담겨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 저와 여러분은 '한 방울 속에 온 바다'라구요. 이는 영혼의 무한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우주의 작고 무의미한 부분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주님 안에서 훨씬 훨씬 더 강력한 무언가의 반영입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의 영혼은 우리 내면의 신성의 불꽃이며 모든 생명의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 행 2:27-28 /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베드로는 다윗과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을 언급하였습니다.
바로 무덤입니다. 29절을 보면 당시까지 다윗의 무덤이 예루살렘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 행 2:29-31 /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다윗은 분명히 죽어서 장사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다윗의 무덤은 또한 다윗의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줍니다.
이에 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시대 종교 정치권력에 의해 사형 당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아리마대 요셉의 선의에 의해 겨우 수습되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초라한 무덤은 예수님께 별다른 의미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을 비우셨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놀라운 진리를 32절에서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외쳤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설교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 행 2:32 /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죽임 당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사도들은 바로 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화려한 무덤을 가진 왕이 아니라, 무덤을 비운 하나님의 아들을 전하는 증인들입니다. 우리가 증언하는 복음의 주인공은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왕국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신 권능의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완전한 사랑과 생명력으로 감싸고 계심에 집중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과 주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권능의 성령을 힘입어 힘차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와 희락을 누리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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