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님의 세미한 음성
왕상 19:11-12
지나온 모든 역사 속에서 생존이라는 삶의 문제를 놓고 인간에게 있어 사라지지 않던 질문이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강한가?'입니다. 강한 것 곧 힘이 세고, 굳고, 단단하여 내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것, 이것이 인간 최대의 관심사입니다. 석기에서 청동기로, 청동기에서 철기로 흘렀던 것을 알 수 있듯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누가 더 강한 물질로 만든 무기를 소유하였는가?'입니다. 이 질문은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시대에서도 유효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를 돈과 지위, 학벌과 재산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쩌면은 고대시대보다 지금이 더 치열하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먼저 이 소중한 주일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오신 모든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진정한 강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아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두 번째 질문이 주어집니다. '무엇이 가장 강한가'에 대한 대답은 얻었으니, 그 다음 질문은 이렇게 나오겠지요. 그렇다면 가장 강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아마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거처를 저 높은 하늘 보좌나 천국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강하고 뜨겁고 놀라운 기적으로 임하실 것이라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삶 가운데 특별한 이적이 임하기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특히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이적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이런 어지럽고 복잡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강하신 기적을 바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능히 모든 일을 하실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강함은 바람이나 지진, 불 가운데서만 임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진정한 승리는 이적과 같은 외적 현상이 아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부드러운 마음과 열린 귀로부터 시작합니다.
오늘 성경의 주인공인 '엘리야 선지자'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해서 승리하고 우상 숭배하는 모든 선지자를 죽였던 카리스마가 넘치던 사역자였습니다.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비가 오지 않았고, 그가 또 기도하니 3년 6개월 동안이나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는 '기도의 사역자'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이적과 역사가 엘리야를 통하여 나타났습니다. 엘리야의 삶 자체가 승리와 감격이 넘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카리스마 넘쳤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음을 구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갈멜산에서 보여 주었던 예전그 모습의 엘리야가 아닙니다. 지금은 로뎀나무 아래에서 지칠 대로 지쳐서 차라리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나약한 모습으로 아무 소망이 없어 보이는 연약함이 지금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엘리야는 아합의 왕후 이세벨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한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 왕상 19:2 /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전의 승리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 당당했던 그의 신념과 모습은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인의 말 한 마디에 무참히 꺾여져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지금 처한 자신의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도피자에 불과하였습니다. 아마 엘리야 자신도 이런 모습에 낯설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저 여자의 한 마디에 가슴이 철렁하여 도피자의 자리에 서다니...'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위풍당당한 사람 아닙니까! 물 위를 걸었던 분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예수님의 수제자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다른 사람은 다 주님을 떠날지라도 자기는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연약한 내면을 보시고,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을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굉장히 마음이 불편했을 것입니다. '주님 나를 그렇게 밖에 보지 않으십니까? 나는 주님의 죽는 자리까지라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나를 그렇게 보지 마십시오'라고 큰소리 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랬던 베드로가, 한 여종이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라고 말하자,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며 자신의 신념이 무너지고 맙니다. 닭이 우는 순간,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을 때, 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 왜 울었겠습니까? 자신의 연약함을 직면한 통한의 눈물이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던 거짓 선지자들을 처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엘리야가 행한 일을 알고는 24시간 안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원하였던 것은 이세벨과 당당히 맞서 승리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게 낙심하여, 죽기를 하나님께 구합니다.
❚ 왕상 19:4 /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하나님께서는 탈진하여 있던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서 구운 떡과 물을 마시게 하시고 40일 밤낮을 달려 호렙산까지 도망가도록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 왕상 19:5-8 /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를 향하여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질문하십니다.
❚ 왕상 19:9 /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런데 이 질문이야 말로 좀 이상하지않습니까? 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시고는 엘리야더러, "여기에 왜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면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행에 필요한 음식도 주시고, 엘리야가 달아나도록 인도하여 주시고는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엘리야가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맞서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에 반(反)해, 엘리야는 상황을 탓하고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뿐입니다.
❚ 왕상 19:10 /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는 자기가 기대했던 상황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죽이려는 세력이 더 기세등등한 것을 보고는, 두려워 떨며 죽여 달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만일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죽였을 것입니다. 하루만 더 있다 죽이겠다는 말은, 이세벨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이려 하지 않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을 듣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우리도 어려움을 당면하게 되면 우리의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이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십니다.
❚ 왕상 19:11-12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내가 곧 지나갈 테니 내 앞에 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큰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날려버릴 만한 바람 속, 모든 것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지진 속, 그리고 모든 것을 태울 수 있는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라고 하셨으면서 왜 하나님은 계시지도 않는 바람과 지진과 불을 보여주신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보여주시기 전에, 안 계시는 곳을 먼저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계실 것이라 생각되는 외부, 사람의 눈에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 세미한 소리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별과 별을 운행하며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하나님의 손길이, 엘리야의 삶과 몸 속에까지도 속속들이 스며들어 쓸고 다름고 달래면서 운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선연하게 느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왕상 19:13 /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엘리야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고 나가 동굴 입구에 섰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한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엘리야야, 여기서 뭘 하고 있느냐?"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 가운데 계셨습니다. 그것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신성과 하나가 될 때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소한 다툼과 분쟁을 일거에 잠재울 수 있는 길임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때, 세상사의 온갖 시름과 번뇌가 저절로 뒷걸음치게 됩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곤 하는 마음의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지름길은 어디 머나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내장된 신성을 알아차리고, 그 신성으로 하여금 발언을 하게 하고, 그 신성으로 하여금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자기 자신을 꽃피우도록 허용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분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명의 정탐꾼이 "우리는 그 땅 사람들에 비하면 메꾸기와 같다" 라고 말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절망적인 이야기를 듣고 낙담한 것입니다.
❚ 민 13:32-33 / ...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에 비하여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비록 아낙 자손이 있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과 은혜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 민 13:6-8 / ...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은 상황만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은혜를 평강을 얻게 됩니다. 우리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때, 우리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 민 6:23-26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우리는 성령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받기를 원하고, 드물게는 성령의 임하심으로 인해 예언과 방언의 말을 하면서도, 일상 속으로 돌아와서는 그것과 거의 무관한 듯이 세상사의 욕망과 부질없는 감정들에 휩쓸여 지내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도 몸과 마음이 아프거나 여러 가지 형태의 곤경이 닥쳐 살림살이가 위태로워지면, 다시 성령을,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부르고 탄원하면서, 거기에서 위안을 구합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성령을 어딘가 낯설고 먼 곳에 모셔놓고는, 가깝게 끌어당겼다가 멀리 밀쳐놓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겉거죽의 육신이 아니라 '영혼' 자체이며, 영으로서 사는 것만이 진정한 삶임을 알아야겠지요!
오늘의 이 긴 말씀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그림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마태와 천사라는 그림인데요, 이 작품은 빛의 화가로 유명한 렘브란트가 그린 것입니다.
이분이 그린 '마태와 천사'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여기서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 마태를 말하는 것이요, 천사란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시는 영으로 나타납니다.
1. 렘브란트의 '마태와 천사'
렘브란트는 수평구조로 천사와 마태를 그렸습니다. 즉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마태가 앉아 있는 그 뒤에 천사가 있습니다. 마태는 천사를 의식하지 못합니다. 골몰히 생각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심하는지 이마가 반짝입니다. 이는 골몰히 생각하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모든 지적인 노력을 다하여 마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뒤에 하나님의 영감의 손길이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렘브란트의 탁월한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성경의 저자인 마태를 표현하되, 성령의 인도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빛과 그림자의 대가 렘브란트는 생각에 잠긴 나이든 남자의 얼굴과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왼손, 펜을 잡고 있는 오른손에 밝은 빛을 집중하여 그가 깊은 사색에 잠겨 책을 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림 속의 나이 든 남자, 마태는 머리에 띠를 띠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그의 주름 잡힌 얼굴, 생각에 잠긴 깊은 눈매, 길게 자란 수염, 손의 힘줄이 두드러져 보이는 긴 세월을 보여주는 손은 그의 삶의 깊이와 사고의 넓이와 지금 글 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밝게 빛나는 빛은 오래되어 보이고 많은 작업을 거친 듯 닳아있는, 펼쳐진 책에서 정점에 이릅니다. 마치 모든 사색과 고뇌와 통찰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습니다.
2. 렘브란트의 천사모습
그런데 그 왼쪽에 얼굴만 빛이 나는 젊은이의 모습이 마태의 뒤에 보입니다.
젊은이는 손을 마태의 어깨에 얹고 있는데, 마태는 젊은이가 뒤에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 앞만 보고 있습니다. 격려하는 듯, 인도하는 듯 마태의 어깨에 살짝 놓인 젊은이의 손끝만 밝게 화면 위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젊은이는 눈을 내려깔고 은근하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들릴 듯, 말 듯.
속삭임이 소근 소근 소근........
마태는 귀에 들리는 이야기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렘브란트는 이 그림에서 우리에게 직접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태가 성경을 쓰며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 그림에서 보이는 것처럼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들은 영이고, 혼이고, 몸입니다. 가장 내밀한 차원이라 할 수 있는 영은, 혼이라는 옷을 입고 있습니다. 몸은 현현(顯顯)을 위한 수레입니다. '작은 나'에 갇히지 않고 '큰 나'를 사는 일은, 혼과 몸의 적극적인 협력에 달려 있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아는 일은, 우리가 지금껏 모르고 지내온 숨은 법칙을 작동하게 해줍니다. 지금까지 겨울잠을 자고 있던 영적인 힘을 열어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전존재로 살기 시작할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소통하는 능력은 혼에 속하는 일입니다. 오감을 통해 얻어진 정보들은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더 조밀한 몸으로 전달됩니다. 혼은 큰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 혼이 주께 얼마나 순종하는가에, 그리고 영의 바라는 바를 겉거죽의 몸에 얼마나 잘 전달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진실된 삶을 통하여 영적 진동을, 축복과 치유의 파동을 주변 사람들에게 내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빛나고 순수한 삶의 모습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성령의 세밀한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보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곳에 중심을 두고, 그 중심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훈련을 함께 해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함께하고 계시는 우리의 영을 중심 삼아 생각하고, 호흡하고, 행동하면서, 겉의 몸을 온전하게 만드는 한 주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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