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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사 62:1-3, 주일 예배 설교

by tat tvam asi 2024.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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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62:1-3

 

오늘 말씀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와 예루살렘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버림받은 땅들과 황폐해진 모습들이었습니다. 70여 년 동안 돌보지 않는 땅들이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성전은 파괴된 채로 있었고 도시는 폐허 그대로였고 곳곳에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황무지만이 돌아온 이스라엘을 반갑게 맞아 주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은 이스라엘로 돌아가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 기대하였는데, 막상 도착하여 보니 정말 실망스런 상황뿐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을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 환경도 마치 바벨론 포로 이후의 삶과 같이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을 환경과 상황이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실망과 절망가운데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자들입니다. 크게 잘못해서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에 끌려가 포로생활을 했던 실패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절망과 실망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다시 희망의 역사를 써내려 가라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바벨론 포로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처럼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경제는 더 힘들어 지고, 정치와 사회가 더 좋아질 것 같지 않는 황무지와 같은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야 할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리 저리 흔들립니다. 어디에 희망이 있습니까? 저는 희망이 교회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62:1 /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쉬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유다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열심히 있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다시 희망이 될 수 있고,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다시 희망이 될 수 있는 것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열심히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희망이 될 수 있는 근거는 절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절을 시작하면서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같이 나타나도록 하겠다.’ 선포하십니다. 이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럼으로 이 희망은 바로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62:2-3 /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혼인잔치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크게 당황합니다. 아직도 올 손님은 많은데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문제를 예수님에게 갖고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종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일렀습니다. 이는 어머니 마리아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을 붙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2:4-5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이 다시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잠잠하지 아니하시고 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잠잠하지 아니하시고 열심을 내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족하고 죄악 투성이며, 실망도 끊임없이 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런 열심을 내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녀 된 백성을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어떤 부모가 자녀를 잊을 수 있습니까?

 

 49:15-16 /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워지지 않도록 아에 손바닥에 새겼습니다. 영원히 나를 놓치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사랑이 너무나도 분명하심을 말씀하여 주십니다.

몇 일 전 냉면 한 그릇을 먹었는데 12,000원이나 하여, 성도님들에게 "냉면 가격이 너무 비싸요" 하였더니, "목사님! 거기는 싼 곳이네요. 보통 15,000 16,000원 해요." 라고 말해 주셔서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시장물가가 천정부지로 올라가니, 삶이 많이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 교회 안에도 점점 희망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의 특징이 있다면 의욕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기대감이나 설레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어둠을 뚫고 희망을 되찾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하여 응답하며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오늘 많은 믿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예배를 보는 구경꾼으로 전락되었습니다. 소위 ‘예배 보는’ 교회의 특징은 뒷자리부터 항상 찬다는 점입니다. 뒷자리는 자기를 보는 사람이 없어 마음이 홀가분하고 또 멀리서 강단과 찬양대를 바라볼 수 있어서 구경하기에 편안합니다. 목사가 예배 인도하고 장로가 기도하는 것을 구경합니다. 앞자리에 앉은 교인들의 뒷모습을 구경합니다.

 

이제 구경꾼이 아니라 예배자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이 자리에 나오셨나요?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오셨습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사모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성도들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사도 요한은 마음속에 강한 기대감과 설레임이 있었어요.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 속에 있었던 기대감을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어요.

 

 1:10-15 /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설교자와 예배 순서 맡은 자들에게 둘러싸는 것을 상상해야 합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다시 돌아와 예배가 회복되고, 지역사회와 세상을 향하여 주님의 역사가 넘처나는 꿈들을 꾸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이 땅에 고통과 어려움이 떠나가고, 무거운 짐들이 벗겨지는 것을 상상해야 합니다.

 

예화) 교회를 개척한 전도사님이 거리에 나와서 전도를 합니다. 마침 그곳에 약장수가 옆에서 약을 팔고 있습니다. 약장수가 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합니다. 그런데 전도사님이 복음을 외치는 곳에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전도사님이 가방을 싸고 있었습니다. 옆에서 약을 팔던 약장수도 짐을 챙깁니다. 그때였습니다. 약장수가 한심하다는 식으로 전도사님을 쳐다보며 말을 건냈습니다.

“전도사님! 실은 제가 파는 약은 가짜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진짜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님의 모습이 가짜를 파는 약장수보다도 열정이 없습니까?” 라고 핀잔을 하더랍니다.

 

열정에는 3요소가 있는데 이를 3v라고 합니다. ① Vision(비전, 삶의 방향), ② Venture(벤쳐, 모험), ③ Vitality(바이탈리티, 생동감)입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에게서 열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까?

 

첫째, 비전 - 삶의 방향이 뚜렷해야 합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삶의 방향을 모르기 때문에 열정적인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29:18 /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여기서 묵시는 영어 성경은 비전(vision)으로 번역됩니다.

방자히 행한다는 말은 방향을 잃어버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비전이 없으면 방향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즉 비전을 바라보고 나갈 때, 우리는 온전한 열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둘째, Venture(벤쳐, 모험, 도전)입니다.

열정은 곧 모험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여 도전하지 않으면 어떠한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럼으로 주님이 내게 비젼을 주실 때, 두렴 없이 믿음의 모험을 떠나는 것입니다.  

 

셋째, Vitality(바이탈리티, 생동감)입니다.

열정적인 사람은 그의 삶에서 생동감이 묻어나옵니다.

열정적인 표정, 언어 구사, 행동 등 모든 영역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생동감은 전이되며,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이 생동감에 나에게도 전이가 되어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에 열정이 있는 사람에게는 징표가 나타납니다.

❶ 먼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언어로 삶의 징표가 나타납니다.

"당신이 옆에 있어 감사해...

우리 교회에 새로운 역사가 넘치게 될 거야..."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표정에서 삶의 징표가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하게 해보세요.

그리고 활짝 웃는 얼굴로 옆사람과 인사해 봅시다.

"당신의 미소는 백만불짜리입니다.

와우 얼굴만큼 멋있는, 예쁜 마음을 가지셨군요."

 

<예화> 미국 대통령의 75%는 학창 시절 중간 성적이었다고 합니다.

포춘지를 보면 100대 기업가 중 50%가 대학 공부를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그들이 비범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열정의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영혼의 갈급함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푸신 은혜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42:1-2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시인은 사슴이 물을 찾으려 메마른 광야를 헤매어 뛰어다니다 헉헉거리며 목말라하는 모습을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는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여기서 ‘갈급하다’로 번역되는 ‘아락’ 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목말라하는 모습뿐 아니라, 목마름 때문에 숨을 헐떡이며 부르짖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사슴이 물을 찾아 갈망하듯이, 시인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기를 갈망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대감이란 어떤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심정입니다. 즉 기대감이란 시간과 물질과 생명을 쏟아 부을 정도로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반드시 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십니다.

 

 7:38 /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몽고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내려놓음” 의 저자 이용규 선교사가 2005년도 봄 몽골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벌러르 라는 한 자매가 예배 시간에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예배를 앞두고 전 재산과도 같은 소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소를 찾으러 이리 저리 뛰어다니다가 예배 시간이 다가오자 소를 포기하고 들판을 가로질러 뛰어왔기 때문에 땀범벅이 되어 예배당에 온 것입니다. 그때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벌러르 자매가 소가 아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선택한 믿음이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배가 끝나 밖에 나갔는데 잃어버렸던 소가 나타났습니다. 소가 예배 처소에 제 발로 찾아 온 것입니다.

예배를 향한 기대감,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을 주께서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소가 아닌 예배의 기쁨을 선택했던 그 자매에게 예배와 소라는 두 가지 기쁨을 동시에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이란 이론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을 가지고 나아가는 성도에게는 생수의 강을 더하는 축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오늘 주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기대하며 나아가는 가운데 날마다 생수의 강이 흐르는 주님의 복된 자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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