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하나님
요 4: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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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중순인데도 낮에는 무척 높은 기온이라 많이들 더우시지요? 말씀을 준비하며 예배를 드리러 오시는 모든 성도님들의 모습을 한 분 한 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임마누엘을 깊이 체험하시기를 깊이 소망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변혁이 있었어요. 예전에는 수요일이면 으례 성전에 나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듣는 오프라인 이었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사람간의 만남의 형태가 바뀌고, 코로나 이후부터 직접적인 만남은 최소한의 단위와 통제로 이루어는 상황에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으로 우리가 지켜왔던 가치들이 막 흔들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2024년부터는 명절 때 고향으로 가기 위해 민족대이동이 다시 이루어지고 있고, 학교에서 또래들이 만나 같이 공부하고 놀면서 뒹구는 학습시간에 익숙해졌지요. 물론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여행, 그리고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 드리던 예배가 다시금 이루어지는 것 같아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너무나 익숙하던 것들이, 고민과 제제를 거쳐야 하는 것들이 되었을 때, 많은 분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여러 심리적인 갈등에 놓여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것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드려야 하나 등 많은 질문 막 머릿속을 휘졌기도 한다는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 역시도 같은 고민을 하고, 속시원한 해결책을 바라며 기도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때 그 해답을 얻게 해준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4장 21절로 24절의 말씀입니다. 성경 속에서! 성경에는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에게 완벽한 통찰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요 4:21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요 4:23 /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오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담입니다. 예수님이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괄시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먼저는 그 출신이 유대인들에게 부정하다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이었고, 또한 동포들에게는 그 사생활에 대해 부정하다 낙인찍힌 사람입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이웃 간의 왕래 없이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삶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물을 한 잔 달라는 예수님의 말에 여인은 놀라 말합니다. “아니, 이봐요 당신 유대인 아닌가요? 왜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나요?” 이런 그녀의 경계심은 예수님이 그 마음 속의 소망과 그 치부였던 사생활을 모두 알고도 계속해서 말을 거실 때에 조금씩 허물어졌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예수님은 갑자기 물을 달라 요청한 일면식 없는 이상한 유대남성에서, 훌륭한 통찰의 능력을 가진 선지자로 승격했습니다. 따라서 여인은 그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고민을 하나 털어놓습니다. 그 고민은 놀랍고 기특하게도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디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런데 아직 여인에게 있는 예수님을 향한 경계심은 풀리지 않았어요. 여인이 이렇게 질문했거든요. “우리 조상들은 이 산(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던데요.”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 답변이 방금 읽은 본문입니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조금 동문서답이죠? 여인이 제시한 두 가지 선택지 중에 어느 것에도 걸치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예배의 본질을 관통하는 것이었어요. 한 마디로 말해서 예배에 대하여 여인은 장소로 묻고, 예수님은 관계로 대답하신 거예요.
참된 예배는 사마리아 여인이 오해했듯이 예배 장소나 예배 방식에 그 본질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참된 예배의 본질이 분명해졌어요. 예배는 자녀 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표면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중심의 문제이며,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중심이 아닌 부수적인 것에 집착하거나, 확고한 고정관념으로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여인에게는 우리와 당신이라는 부동의 경계가 있었어요. 우리는 곧 사마리아인이고 당신들은 유대인입니다. 그녀에게 있어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예배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예루살렘에서의 예배만이 참되다 주장하는 반대편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예수님의 대답 중 왠지 흐름을 방해하는 것 같은 구절이 하나 등장합니다. 이 구절이 없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툭 튀어나와있는데요, 바로 22절 말씀입니다.
요 4:22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이 구절의 앞뒤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모습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뜻 보면 여인의 유대인 사마리아인 구분짓기에 동참하는 것 같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사고방식을 비틀기 위해, 여인이 사용했던 단어, 곧 여인의 말을 빌려 다시 설명하심으로 그 시야를 넓혀 주신 것입니다. 여인이 제시한 두 가지 공식을 예수님은 모두 부정하십니다. 유대인이면서 ‘예루살렘에서만 드리는 예배가 진짜 예배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타고난 핏줄로 선택받은 유대인들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씀은 유대인인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우리 안에는 사마리아 사람도, 세리도, 그 어떠한 위치에 서있는 사람이라도 모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고백하고 영과 진리로 예배드린다면 예수님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 그리스도임이 분명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도 내팽기고 사람들에게 달려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 예배자로 다시 섰습니다. 우물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장소에서 그녀는 영적 고민이 해갈되고,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는 참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만약 우리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해서 더 이상 가족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거리는 마음의 연결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 마음에 상대를 향한 끊임없는 기도와 사랑이 있다면 분명히 서로 이어져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족은 대면의 빈도가 아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관계에 있습니다.
명절에 우리가 모이지 못한다고 해서 가족이 아닌 것은 아니듯이, 예배 역시 교회라는 특정한 장소에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의미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우리’라고 표현하셨듯이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고 믿는 자들의 공동체, 곧 예수님의 12제자로 시작하여 초대교회와 지금의 교회로 이어져온 믿음의 공동체는 큰 의미를 지닙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도 같이 교회는 한 지체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깨닫자마자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곧장 사람들을 향해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며 예배자로 굳게 선 사마리아 여인처럼, 흔들리는 시대에도 예배에 확실한 믿음의 뿌리를 내려 담대하고 굳세게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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