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종교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장 24-27절, 은혜로운 전도사님의 수요 예배 설교

by tat tvam asi 2024. 8. 20.
반응형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요한복음 5장 24-27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할렐루야! 무더위로 인해 잠 못 들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기온이 22도까지 내려가서 깜짝 놀라기까지 했어요. 교육부와 장년부 여름성경학교를 마치고 나니 기가 막히게 딱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올 여름도 참 더웠죠? 이제 기후 위기로 인해 지구가 점점 더 뜨거워져서, 앞으로 다가올 여름 중 올해 여름이 가장 시원하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니 참 걱정이 큽니다. 좋은 소식보다 화나고, 슬프고 걱정되는 뉴스가 더 많이 들리는 요즘 우리 성도님들의 몸과 마음의 상태는 어떠신가요? 계절은 가을이 되었지만 우리 마음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 뜨겁게 타는 중인 것 같습니다. 분명 이전보다 물질적으로 기술적으로 풍요로운데, 그것이 마음의 풍요와는 연결되지 못한 것이 요즘 시대의 모습인 것 같아요.

 

더 많은 소유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착각으로 세상은 빠르게 달려왔지만 그 결과에 대한 무거운 책임이 하나 둘씩 눈 앞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21세기는 세계화, 정보화를 통해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자유를 보장받고, 이러한 일들은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행복보다는 분노를 쉽게 이야기하는 시대가 된 것 같아요. 

 

희망, 그러니까 '지금은 힘들어도 열심히, 바르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성공할 거야. 모든 게 잘 풀릴 거야'라는 믿음이 있을 때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임할 수 있는데, 그 희망이 없어지면 인생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으로 인해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빠지거나 혹은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변하거나, 아니면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말과 행동, 사고방식은 단순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쉽게 흥분하여 아무것도 아닌 일에 상대를 매섭게 정죄하며 심판하는 자리에 서고요. 어떠한 현상에 대해 깊게 고민하기보다 빠르고 쉽게 답을 내려 고민해야하는 순간을 회피하기도 하지요. 이러한 태도는 비단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은 분노와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경고합니다.

 

성경의 첫 장이자 이름에서부터 처음 또는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닌 창세기는 태초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1장으로 11장을 통틀어 원역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온 세상에 관한 이야기죠. 그 안에는 천지창조, 선악과, 가인과 아벨, 노아의 홍수, 바벨탑과 같은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원역사는 인간의 죄에서 파생되는 비극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합니다. 내 마음대로 결정하려는 욕망과 나와 내 편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을 희생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그 오랜 옛날에도 펼쳐져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의 욕망처럼 분노와 불안을 원동력 삼아 올라왔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 서로에 대한 불신, 자신의 맘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향한 분노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비극은 하나님 없이 내가 선악을 분별하겠다는 선택에서 출발합니다분명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분의 형상대로즉 하나님의 선하심창조성생명력을 담아 우리를 빚으셨고심지어는 생육하고 번성하고충만하라다스리라는 놀라운 명령을 주십니다우리는 하나님과 하나였고하나님과 일상을 공유하는 관계였습니다하지만 악은 하나님과 나를 분리하며 인간의 마음 속에 불안을 심었습니다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을그리고 스스로를 더 신뢰하는 죄를 짓게 되었으며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기 시작합니다선악과를 먹은 후이 사실을 들킨 아담과 하와는 죄를 회개하기보다 서로에게 잘못을 돌리며 분노합니다선악과를 먹음으로 받게 된 형벌은 감히 인간이 하나님께 도전하였기 때문에 괘씸한 마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벌주신 것이 아니라 끝도 모르고 달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제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정점을 이루었습니다. 인간은 죄악 속에서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기에 하나님의 아들, 참 신이자 참 인간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 안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참된 구원과 기쁨, 나아갈 방향을 값없이 나타내셨습니다. 분노와 불안이 우리 모습인 줄 알고, 죽음의 상태에 익숙하게 젖어있던 우리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생명력을 담아 만들어진 내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이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제사장이나 바리새인 같이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이전 상황을 잠시 말씀드리자면 이 날은 안식일이었어요. 안식일은 하나님이 6일간 창조하시고 칠일 째에 안식하신 것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날이지요. 따라서 안식일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일상 생활의 규칙적인 노동을 중지하고 쉼을 누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날 유대인들 눈에 율법을 어긴 사람이 포착되었습니다. 여러 활동을 금지한 안식일에 한 사람이 자신이 쓰던 침구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람을 제지합니다. 안식일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당신의 행동은 잘못되었소. 그러자 이 사람이 말합니다. 나는 38년 동안 걷지 못하던 사람인데 나를 낫게 한 이가 나에게 내 자리를 들고 걸으라 명하였습니다. 성도님들, 38년 그 긴 세월을 그저 앉아서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누군가의 부축 없이 혼자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는 기적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남 일이라 할지라도 이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 일인가요? 그런데 이 간증을 듣고도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냐”

 

마땅히 기뻐하고 축복할만한 일에 유대인들은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곧 그 분노의 화살은 사람을 살린 예수님에게 향하였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지켜야 할 율법을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원 목적이 무엇인가요? 휴식입니다. 그동안 쉼없이 달려오던 사람들에게 쉼을 통해 안식을 주고, 창조주이자 우리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뻐하라는 것이 안식일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가치는 상실한 체, 그 포장지에만 매달리니 이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 다 적이 되고, 악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잘못을 돌려야만 자신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이 모습,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요? 창세기에 나온 인간의 죄가 떠오릅니다. 적대감은 사람의 사고를 마비시킵니다. 현실을 왜곡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해석하게 하지요. 스스로의 행동이 이성적이고 정의롭다고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무엇이 선인가요?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일을 실천한 것일까요? 어디에 생명이 있나요? 성경은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모습을 대조하며 우리에게 질문합니다. 요한복음 5 8절로 10입니다.

 

5:8-10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유대인들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안식일과 옳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율법을 오히려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로 전락시키자,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그들에게 자유함을 주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본문 요한복음 5 24절로 27의 말씀입니다.

 

24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유대인들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정이한 선이 얼마나 편파적이고 이기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무엇보다 중시하며 스스로를 선이라 생각하던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외치는 선을 관철시키기 위해 어떠한 행위를 저질렀나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당시 이스라엘을 침략한 로마 정권에 의탁하여 예수님을 고발하고 억지로 죄명을 붙입니다.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노라고 말하는 빌라도에게 차라리 강도 바라바를 풀어줄 지언정 예수를 죽이라 외칩니다. 심지어는 예수를 죽이는 것은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이라 표현하기까지 합니다.

 

이상하지요? 그토록 율법을 외치던 유대인들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 무엇인가요? 누군가의 죽음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8 12절로 14의 말씀입니다.

 

요 18:12-14 /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이처럼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선악을 선택하기로 결정한 후, 세상은 힘의 논리가 우선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실패자와 약자, 범죄자만 만들어내는 그 힘의 논리를 몸소 부수기로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 12절로 14의 말씀입니다.

 

요 15:12-14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내 안에 있는 분노와 불안을 벗겨내면 비로소 친구가 보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해하려는 무리가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것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위함이셨고, 또 죄악 가운데 서로를 해치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유대인들을 들어 말씀을 전한 것은 그들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유대인들의 죄악을 통해 예수님을 높이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유대인들을 욕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입니다적대감불신불안분노는 여전히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의도하였든의도하지 않았든 이 혼란한 마음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 안의 잠재력을 올바르지 않은 방향으로 표출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 내가 가진 정답만을 고수하는 것만이 선이요 강함인 줄 알았던 우리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지평을 넓혀주셨습니다. 사랑의 실천, 곧 남을 살리는 생명의 행위가 우리의 원래 모습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랑과 생명은 모든 것을 우선합니다. 

 

율법보다도 내 욕망보다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기억하시죠? 강도 만나 쓰러져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았지만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돕지 않았습니다. 부정한 것에 손대지 말라는 율법으로 인해 피 흘린 이를 만지면 자기도 부정해질까 하는 불안 때문이었죠.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즉시 그에게 다가가 치료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계명이 아닙니다. 내가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 공기를 호흡처럼 것처럼 당연히 이루어져야하는 일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며 사마리아인의 비유와도 같이 참 와 닿는 일화가 있어서 한번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목은 두 스님 이야기입니다.

 

두 스님이 길을 가다가 냇물을 만났습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건너려고 하는데 어떤 여인이 물이 깊은 것을 보고 건너지 못하고 냇가에서 발만 동동거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자 이를 본 한 스님이 그 여인에게 자신이 업고 내를 건널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뒤 함께 무사히 냇물을 건넜습니다. 여인을 내려주고 두 스님은 계속 가던 길을 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걷는데 둘 중 한 스님, 그러니까 여인을 업는 동안 그 곁에 있었던 스님이 화난 목소리로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스승님이 여인을 쳐다보지도 말고 말도 해서는 안 되고, 만져서는 더더욱 안 된다고 했는데 스님은 지금 계율을 어기고 스승님이 금지한 모든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자 여인을 업어준 스님이 그 스님을 돌아보며 말하였습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나는 강을 건너자마자 그 여인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아직도 그 여인을 업고 계시는군요." 옆의 이 스님은 절 입구에 다다라서도 여전히 그 여인을 생각으로 업고 온 것입니다.

 

이 스님은 하나만 알고 전부를 몰랐습니다. 스승이 그렇게 가르친 이유는 여인을 성적인 대상으로 여겨 함부로 대하지 않기 위함임을 몰랐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작은 일에 분노하고 사소한 일에 불안해합니다. 사랑과 생명에 기반하지 않으면 율법을 지킨다고 이야기 하면서 오히려 남을 해치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사랑은 죽음을 이깁니다. 생명은 율법을 우선합니다. 복음은 사람을 낙담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살아나신 우리 성도님들, 늘 어떻게 하면 사람을 살릴 수 있는지 하나님으로부터 들으시길 바랍니다. 율법에 갇힌 자가 아닌 예수로 자유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으로 생명을 공급받으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20 31을 함께 봉독함으로 설교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요 20:31 /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