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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부름 받는 사마리아 여인, 요 4:25-30, 요한복음 시리즈 설교(21)

by tat tvam asi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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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 받는 사마리아 여인

4:25-30

 

사마리아 여인은 미래에 올 메시야가 모든 진리를 밝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도 참된 예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4:25 /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말씀하셨습니다.

 

 4:26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이 여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자기가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참 예배자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자신을 저주 받은 여자라고 생각하고 이 마을에서 가장 타락한 여자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보시면서 "너는 왜 그 모양이냐?" 하시지 않고, '네 존재가 내 기쁨이고, 내가 너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기뻐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자신이 보는 것이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지요?

사마리아 여인이 왜 그렇게 감격했는가를 아시겠습니까? 그녀는 생전 처음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천사도 감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날개로 얼굴을 가려야 되는데, 그 존귀하신 하나님이 나를 딸로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감격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하여금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 임하는 가장 큰 복 중 하나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말할 수 없는 죄인에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바뀝니다. 전에는 자신이 죄의 종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감추고 꾸미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웬일입니까? 예수 안에서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타락한 죄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애초에 하나님의 자녀였는데,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우리를 다시 되찾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게으르고 성질이 무서우며 나약한지 자신은 알기 때문입니다. 교만하던지 열등감 있든지 모두가 짓눌려 지냅니다. 내가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니 남도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에고(ego)라는 것을 알면 커다란 자유함을 얻는데 말입니다.

 

조셉머피는 자신의 저서 《당신 안의 평화에서 이런 주장을 펼칩니다. 

야곱의 우물은 인간의 내부, 즉 인간의 내면인 영혼과 감정적인 활동을 일컫는다. 이 우물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과 힘이 있다. 그것은 만물 모두가 비물질적인형체로 저장되어 있는 무한한 창고다. 주관적 자아, 즉 이 영혼으로부터 인간의 모든 경험들이 생겨난다. 우리는 내부의 위대한 무의식으로부터 모든 경험들을 받게 된다.

사마리아 여인은 결핍과 제한의 느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종파적 믿음과 편견으로 가득 찬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 즉 우리의 소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실 물을 좀 달라." 이것은 높은 자아, 신적인 자아가 제한이나 문제에서 벗어나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나 어려움을 가질 때마다 그 해결책은 항상 소망의 형태로 문을 두드린다. 우리는 영감(inspiration), 인도(guidance), 힘, 그리고 활기를 마셔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을, 신이 경이로운 무의식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면서 바깥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오감에 의해 전달된 외부현상에 지배된다. 

여인은 우리 안에 있다. 즉 우리의 의심, 그리고 신과 그의 법칙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 기인한 공포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왕국은 자신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하나님의 왕국을 외부에서 찾으면서 "어디서 생수를 얻겠나이까?"라고 항상 묻는다. 

우리가 애원하고 탄원해야 하는 의인적인 신이 있다는 오래된 개념, 즉 전통적인 믿음의 우물이다. 이것은 보통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무자비하고 독재적인 분노의 신이다. 인류는 신이 무형(無形)의 존재로 자신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진리를 거부한다. 

숨결보다 가깝고 손, 발보다 가깝다! 

인간은 진리를 알게 되면서 미신을 버린다. 많은 이들은 제한, 갈등, 고통, 그리고 여러 종류의 불행들로부터 전혀 영향 받지 않는 자신의 심리적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잘못된 견해나 이미 옛날에 죽은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에 의해서 조정되고 지배받는다. 

인간은 자신을 더욱 더 높은 위치로 이끄는 진리를 찾을 수 있다. 건강, 행복, 그리고 평화를 소유할 수 있는 지혜, 지식, 생명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먼저 자신의 진정한 위치를 빼앗아가는 잘못된 지식과 믿음을 제거해야 한다. 

많은 이들은 생명의 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물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마시는 걸로만 생각하고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힘이 있는 정신적 가치에 관한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안전, 완전성, 평화, 그리고 행복을 외부에서 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내부에서 나온다.

지혜, 마음의 평화, 건강, 기쁨, 또는 신에 대한 믿음은 생명의 진정한 선물이요, 만질 수 없는 무형이다. 그것들은 영혼으로부터 온다.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성서에 나온 이야기들의 의미를 다른 관점으로 보는 것도 필요하다. 어떤 이들에 의해 해석된 성서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된 것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는 또 다른 마음의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올바른 지식과 과학적인 지적활동(미신과 선입견을 사라지게 하는 정신적 활동)에 의해서 우리는 높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고 우리 모두는 내부에 있는 높은 잠재력까지 도달할 수 있다.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은 내부에 살아 있는 전능의 영혼이다. 

우리의 마음과 의식 안으로 오직 존귀하고 사랑스럽고 현명한 개념이 들어오게 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의 오감은 잘못된 지식, 잡다한 개념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오류 등을 주입 받아서 마음의 수용매체에 계속적인 영향을 준다. 

결핍과 한계라는 혼돈 항태에 있는 자는 신(GOD)을 자신의 배우자로 삼지 못하고 있다. 마음에 공포와 걱정을 잡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결혼한 것이 아니다. 

당신의 종교가 만족을 주는가? 위안과 마음의 평화, 그리고 내적 성장을 주는가? 나의 모든 사고는 하나님의 진실에 기초되어 있는가? 자신에게 물어보라.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여인과의 대화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외부현상, 즉 오감이 전하는 것과 그들이 소망하는 것과의 사이에 일어나는 논쟁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도전이 있다.

높은 자아는 다음과 같이 당신에게 말한다. "만약 지금 당신이 원하는 상태에 있다고 믿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작은 자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게 좋은 것이 사실일 리 없다. 외부상황을 보라. 우물은 깊고 물 길을 그릇은 없어."

당신 감각의 활동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당신이 갈망하는 상태를 느끼기 시작하라. 당신의 의식에 그런 성질들이 부여될 때까지 계속하라. 그러면 평화롭고 편안한 느낌이 올 것이다. 당신이 주관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객관화된다. 

우리가 먹을 음식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는 정신적으로 모든 좋은 것들을 소유하게 하는 풍요로운 삶이다. 

 

조셉머피의 새로운 관점에서 본 성서해석을 읽으며, 예수님을 믿으면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의미도 다시 새겨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라는 사실을 명확히 말씀하시며,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선언하십니다. 이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있음을 나타내며, 종교적 경계를 넘어 예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내 안의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내 신념에 확신이 별로 없을 때, 그에 따라 강렬한 감정이 올라오지 않을 때 내 행동이 정당하다고 느껴지지 않고 죄책감을 갖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스스로를 잠시 멈춰 세웁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이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선함이 있음을 압니다. 두렵고 절망스러울 때는 내가 나의 작은 자아에게 집중할 때임을 압니다. 

 

나의 두려움은 어디에서 온 걸까요? 쿡 찌르면 벌컥 화가 나는 내면의 야수와도 같은 이 두려움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겠지요! 이 쿡 찌르는 느낌은 두려움을 부추기는 생각을 품을 때 찾아오며, 이런 생각들은 어떤 말이나 행동을 참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질 때까지 점점 더 많은 감정을 불러옵니다.

 

누가 이 생각과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할까요? 나에게 에고가 있다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겠지요. 에고는 내가 가진 소프트웨어의 일부일 뿐이니까요. 또한 이러한 소프트웨어와 프로그래밍이 만들어낸 생각도 내 책임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경험하는 '모든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프로그래밍이만들어낸 생각에 주의를 기울인 결과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떠오른 잘못된 생각에 주의를 기울일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나'입니다.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조셉머피의 글을 읽다가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 보았네요. 다신 본문으로 가봅시다. 

 

 4:27 /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이 때'는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가리킵니다. 방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바로 그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하나님의 모든 복음을 다 전한 직후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마치자마자 제자들이 바로 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상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이상히 여기다'는 말이 헬라어로 '다우마조'입니다. 다우마조는 '기이히 여기다, 놀라다, 경탄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성경은 '이상히 여기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이성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납니다.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릴 때가 있습니다. 또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상할 때는 찬양해야 합니다.

 

찬양을 하면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에 따라 고양(高揚)된 분위기와 내적 기쁨이 생겨납니다. 하나님께 집중된 신성한 사고와 태도, 정신적 기능으로 우리의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지요.

 

빛에 의해 밝혀진 지성, 인간의 지성이 하나님의 지혜로 채워질 때 구원과 해결책이 주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영으로 우리 자신 안에 있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예수님께 그 이유를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요 4:27b /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이 말씀이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예수께 "웬일이십니까?" 하거나, "어찌하여 그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왜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었을까요그것은 주님께는 제자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은 항상 옳으십니다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존경을 받으셔야 합니다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 고민하는 우리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2,700년 전에 이런 메시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사 55:8-9 /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상한 일을 만날 때는 침묵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봅시다. 아니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상히 여기다'는 뜻의 헬라어 다우마조에는 찬양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이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찬양합시다. 그것이 우리 피조물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요 4:28-30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예수님을 만나고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딸임을 발견한 이 여인은 자신을 더러운 여자로 보는 마을 사람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전에는 자신을 더러운 여자로 여기는 것이 싫었기에 피했으나, 이제는 상관없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더러운 여자였다고 말할 작정이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마음은 오히려 감격이 넘쳐났습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딸, 천상의 공주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복음을 깨달은 사람은 죄 속에 살았던 지난 날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우리로 하여금 고백하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을 전할 수 있다면 과거의 나를 드러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감격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좌절감에 빠져있거나, 상처, 죄책감, 열등감에 눌려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열어 주셨던 영적인 눈을 자신에게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다시 복음 앞에, 진리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결론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다! 너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역사하심이 여러분의 온 삶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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