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갈 5: 13-15
비행기 조종사들은 어딜 가기 전에 행로와 행선지를 먼저 정확히 알고 떠납니다.
무턱대고 비행기에 올라타고 비행하는 조종사는 없습니다.
비행을 하다 보면 기류에 밀리 기도하고, 폭풍우를 우회하기도 하지만,
조종사들은 항로를 계속 꾸준히 유지하면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정표가 없는 하늘 위에서 어떻게 비행 항로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요?
제일 먼저는 비행기 안에 달려 있는 계기판들을 모니터하겠지요. 그리고 지상의 관제탑과 교신하면서, 지금 비행기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체크하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때론 예기치 못한 일들이 참 많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전 지구촌이 함께 겪었던 코로나 펜데믹만 하더라도,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힘들게 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삶도, 가정도 방향을 잃어버리고 흔들릴 때가 많이 있잖습니까?
가깝다는 이유로 서로 편하게 생각하여, 있는 그대로 대하는 상대방의 모습에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내 마음을 잘 몰라준다고 속상하기도 하지요. 서로 뾰로하기도 합니다.
'이젠 얼굴도 보기 싫어 하면서' 냉전 중인 경우도 간혹 있잖습니까?
오늘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있는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바람이 일어, 지금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님 계십니까?
어떻게 어려움을 뚫고 나아가고 계신가요?
전투기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 보면 자주 '비행 착각'이라는 것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여객기는 속도가 빠르지 않기 때문에 사고의 위험성이 적지만, 제트엔진 전투기의 경우 매우 빠른 속도로 공중에서 빙빙 돌다 보면,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기 때문에 어느 쪽이 하늘이고, 어느 쪽이 바다인지 구분을 못해서 종종 비행기가 바다에 추락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또 같은 고도에서도 비행기가 선회하면서 회전을 할 때는, 속력을 좀 내면 비행기가 자꾸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속력을 좀 늦추면 비행기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조종사가 비행을 하다가 비행 착각을 일으켜 어느 쪽이 바다이고 어느 쪽이 하늘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을 때, 또한 비행기가 위로 올라가고 있는지 밑으로 내려가고 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감각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계기판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인들도 신앙의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건 흉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신앙 착각은 어떻게 나타나나요?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 삶의 패턴이 분명히 다른데도 말씀보다는 자기의 습관에 따르는 삶을 신앙 착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비행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계기판을 믿는 훈련을 하듯이,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그 말씀에 의거한 내면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1. 하나님 말씀을 붙잡는 훈련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의 첫 마디입니다.
세계의 존경 받는 기업가들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두가 유쾌하게 산다고 합니다. 나의 언어를 남편이 듣기 전에, 나의 언어를 아내가 듣기 전에, 나의 언어를 자식이 듣기 전에, 나의 언어를 내가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 언어가 정말 내게 평안을 주는지, 기쁨과 용기를 주는지, 희망과 소망을 주는지 생각하며 이야기하세요. 부드럽고 사랑으로 가득한 언어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상대의 약점을 결코 고의적으로 건드리거나 그의 아픔을 물고 늘어지지 마세요. 마지막 항복을 받아 내려고 들지 마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그에게 관철시키려고 설득하려고 하지 마세요. 오히려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우리가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첫 마디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과하는 법, 칭찬하는 법, 감사하는 법을 많이 배우고 익혀두는 것도 좋은 습관이 될 거예요.
남편에게 아내에게 "여보! 미안해요. 감사해요. 고마워요"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그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대로 커서도 따라 할 줄 알아요. 몇 년 전에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사과를 저에게 주시며 “목사님 사과드려요” 라고 말해 갑자기 왜 사과를 주시나 얼떨결에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몇 일 전에 제가 본의아니게 목사님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떻게 하면 멋진 표현이 될까 기도했는데, 사과를 드리며, 사과하는 것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라구요. 그 사과를 받고, 얼마나 행복하였는지 모릅니다.😊💖🎶🎉🎈
만일 용서와 사랑을 배우지 못하였다면, 나도 역시 똑같은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내가 피해자라 억울해 하기만 하면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요.
이제 내가 살아왔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붙들고 나의 선택의 기준을 높이는 것입니다. 아주 크게 용서하세요! 아주 크게 사랑하세요! 이 선택은 내가 상상 할 수 없는 새로운 기적으로 나타날 것을 믿으세요.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에게 의미와 가치와 용기와 희망을 주어요.
그 사람만 만나면 삶의 보람을 느껴요. 삶의 의미가 느껴요. 용기를 얻습니다.
가치를 느끼고, 희망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를 통해 유쾌한 첫 마디를 시작해 보세요.
2. 잘 웃어야 합니다.
비행기나 배에 가면 '트림 탭'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요. 뭔가 하면 그렇게 큰 비행기가 크게 방향을 조정할 때에 조정간을 붙들고 낑낑대고 돌리는 것이 아니라, 트림 탭이라는 작은 장치 누르기만 하면, 비행기 방향을 전환하는 장치입니다.
우리 삶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트림 탭은 무엇입니까?
잘 웃는 사람들이 성공을 잘하고, 무너졌다가도 빨리 만회합니다.
웃지 않는 사람들은 다시 회복하는 기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고 해요.
오늘부터 웃어 보세요. 오늘 웃음을 선택하는 거에요.
우리가 심각한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힘듭니까?
결국 믿음이란 더 높은 기준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을 좇기 보다는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하여 나아갑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더 높은 기준을 선택해 나가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음을 선포하여 주십니다. 즉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통해 누구든지,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는 주님이 주신 자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종으로 살다가 자유를 얻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오랜 세월 갇혀서 지내다가 자유롭게 풀려났다고 한다면, 자유를 가지고 무엇을 할까요?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은 우리가 기쁨 가운데 더 높은 기준으로 나아가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자유를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갈 5:13 /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바울은 형제들에게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이 나를 부르신 목적에 따라 어떻게 자유를 사용해야 하는지 ‘자유 사용법’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자유 사용법을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갈 5:13b /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여기서 육체의 기회란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를 내 욕심을 위해서, 죄를 짓는 일에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타락한 본성이 원하는 대로 자유를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고 죄가 승리하도록 그냥 두고 보지 말고 통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절제하는 자유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육체가 원하는 대로, 죄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의 목적에 따라 절제하고 스스로 통제하기 시작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갈 5:13c /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자유'와 '종이 되는 것'은 서로 반대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종이 되기 위해 자유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자유를 얻었는데 그 자유로 다시 종이 되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다시 종이 될 수 있을까요?
"사랑으로" 종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역설적인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종노릇하는 삶은 사랑으로 실천되기 때문에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삶의 기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자유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가진 자로 사는 것은 역설적으로 종이 되어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적인 진리는 주님께서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아침부터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끼어듭니다. 그리고는 한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바로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뭐라고 쓰십니다. 그런 후에 몸을 일으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른부터 시작해서 젊은이까지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 여인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주변을 둘러보시고 여자에게 물으십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이 여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죽을 수도 있었던 위급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건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묶여있던 그녀에게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그녀가 이전과 다른 삶을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자유를 오용하지 않도록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는 주님이 부르신 목적에 맞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자유는 통제되어야 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자유 사용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고, 또한 예수님은 우리에게 먼저 자유를 사용하는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자신의 모든 권세를 내려놓으셨고 그 모든 능력을 육체의 기회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섬기셨습니다. 사랑으로 종이 되셨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고 자신주일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그 자유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은 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고 계신가요?
자유를 잘 통제하고 계십니까? 언제든지 불쑥 튀어나올 수 있는 우리의 에고를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잘 다스리지 않았을 때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자유가 육체의 기회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말입니다.
바울은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은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갈 5:15 /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바울은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 속에 있는 본성은 마치 야생동물의 싸움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서로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 거리며 물어뜯으려고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서로 이빨을 드러내면 교회는 동물의 왕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조심하라"하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아름다운 자유를,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복된 일에 사용하시는 참된 주님의 자녀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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