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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 호 6 : 7-11, 호세아 시리즈 설교(12)

by tat tvam asi 2024.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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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

 6 : 7-11

 

호세아 시리즈 설교(11)에서 말씀을 살펴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바가 제사가 아니라 인애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6:6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렇다고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여로보암 2세 때의 북이스라엘은 부요했기 때문에 수많은 제물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제물을 드린다 할지라도, 형식적인 제사 & 외식적인 번제를 드린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북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보니 인애와 같은 열매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가장 인애가 있어야 제사장조차 인애를 찾아볼 수 없다면 지금 북이스라엘 사회는 어떠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에브라임뿐만이 아니라 유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6:7 /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7절에 보시면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를 6절과 연결해서 보면 내가 원하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인애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는데, 너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몸은 제사를 드리는 곳에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먼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겼다고 할 때’ 창세기에 보면 아담이 타락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는데, 지금 북이스라엘의 죄는 아담의 타락만큼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각함의 증거로 제사장과 관련해서 언급합니다.

 

 6:8-9 /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북이스라엘의 제사장과 관련해서 죄의 심각성을 말하면서 길르앗을, 세겜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도피성이 있는 지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어떤 곳입니까? 도피성은 실수로 살인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성읍입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피살자의 가장 가까운 형제나 친지로부터 피의 보복을 피해 생명을 건지기 위해 도피할 수 있도록 마련된 성읍이 도피성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베다가 도끼가 빠져 사람이 맞아 죽었다면 고의가 아니라 실수요, 부지(不知) 중에 살인하게 된 경우입니다. 그때 죽은 자의 가장 가까운 형제나 친지로부터 피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정당한 재판을 받기까지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된 성읍이 도피성입니다. 따라서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도피성은 가나안 땅 어디서나 쉽게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하루 만에 당도할 수 있는 위치에 선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길르앗과 세겜 지역은 어떤 지역보다 긍휼과 자비, 인애가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가 살고 있다는 점에서, 또한 고의는 아니지만 어쨌든 살인한 자로 하여금 피신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긍휼과 자비, 인애가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바는 무엇입니까?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악을 행하는지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피로 더럽혀지고, 피에 의해 점령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겜 길에서는 강도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 무리가 살인하는 자로 있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제사장 무리, 마치 제사장들이 하나라도 된 것처럼 일심으로 살인하는 그 일에 하나가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 알기를 포기하는 그 자리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알기를 소망하는 그 자리만이 하나님의 집이라 일컬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6:10 /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8절과 9절이 제사장과 특별히 도피성이 있는 성읍에 대하여 말했다면, 10절에서는 북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다고 하면서 음행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음행이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남유다에 대해서도 언급하십니다.

 

 6:11 /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남유다 역시 북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더 심각함이 있는데, 왜냐하면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하나님의 순수한 예배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유다의 경우도 북이스라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 북이스라엘의 심판이 정해진 것처럼 너희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를 정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생각해야 합니다. 북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 지식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인애라는 경건의 열매도 없었고, 그 심각성을 제사장들이 깨닫고 돌이켜야 할텐데, 오히려 도피성이 있는 두 성읍을 언급하면서 가장 인애가 넘쳐야 할 고을이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 되었다고 말씀하실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지식에 근거해 가장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인애가 있어야 할 교회가 반대로 악을 행하는 자의 교회라고 한다면 그것보다 한탄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몸 된 교회요 성전이라면 악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정당한 하나님 지식에 따른 긍휼과 자비와 인애가 넘칠 수 있는 자가 되도록 말씀을 통해 자신을 비춰봐야 할 것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에 합당한 열매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 열매를 위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나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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