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사람들의 믿음
요 4:39-42
오늘은 예수와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따라서 오늘 부분은 이른바 결론 부분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를 통해서 결론적으로 저자가 하고 싶었던 주제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시기 위하여 사마리아 수가성에까지 오셔서 한 여인에게 물을 달라 요청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기 위하여 성령과 진리의 말씀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 표면적으로 동일한 단어가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수 있습니다. 그것은 동사로 "믿는다" 라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아주 중요한 본문입니다.
요 4:39 /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여기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정말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여인의 말을 믿었을까?' 다섯 번이나 결혼하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랑 동거하며 살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 사람들은 아마도 그녀에게 손가락질을 하였을지 모릅니다. 그런 동네 사람들이 싫어서,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싫어서, 언제나 홀로 먼 거리를 물 길러 다녔습니다. 사람과의 교제가 없는, 마치 왕따 당하는,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이런 여인의 말을 믿어 주겠습니까?
그런데 본문 39절을 보시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여인의 말을 믿었다고 합니다.
왜 믿었을 수 있었을까요? 그녀가 전한 것이, 다름 아닌 자신이 만난 예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확하게 이 구절을 번역 하면 "증언하는 여인의 그 말(로고스) 때문에" 다시 말해서, 그 말(로고스)만을 증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증언한 것이지요. 39절에 나옵니다. "그러자 동네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선포적 증언은 바로 예수였습니다. "증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해야 하는 첫 번째 임무입니다.
그리고는 믿는 사마리아인들이 행한 첫 번째 행동이 나옵니다.
요 4:40 /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그들이 "함께 유하기를 청하였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함께 머물다, 동거하다, 함께 살다는 뜻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 "우리 안에 거하여 주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말하는 그러한 장면입니다. 우리가 거하는 이곳에 당신이 오시길 소원합니다. 당신이 만약 우리와 함께 유하신다면, 우리 역시 당신 가운데 거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유하기에 가장 좋은 곳, 평안함을 가장 많이 누릴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예수님이 거하는 곳, 예수님과 함께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거해야 할 곳은 예수님 안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거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완전한 구원의 공간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취하게 되면 우리가 살면서 겪는 문제들을 제대로 풀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생기는 차원 안에서는 그 문제들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제대로 해결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셨던 예수님처럼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여 '문제를 푼다'는 생각도 없이 문제를 풀어내시는 '진정한 대가'가 되기 위해서는, 문제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위로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문제가 제대로 보이고, '나'라는 존재는 문제 자체, 즉 생존의 문제, 사랑의 문제,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명예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경험하는 자’임을 깨닫게 되어 예수님처럼 '존재의 새로운 지도'를 그릴 수 있게 됩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오감의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거기에 매이지 않고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삶! 그 길은 바깥으로 멀리 뻗어 있지 않습니다. 그 길은 거짓된 에고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도, 거기에 속지도 않는 진정한 '나', 즉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께로부터 생기를 코에 불어넣은 존재의 원형에게로 돌아가 안기는 길입니다.
우리의 삶과 평안과 아무 탈 없이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 안에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무한한 공급원이 되시는 온 우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게 안겨, 그 안에서 집을 짓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 질병, 빈곤, 관계의 삐걱거림, 감정의 상함 등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과연 있을까요? 사회적인 변동에 출렁거리지 않고,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질문을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인생의 쓴 바다에서 감내해야 할 고통과 질곡이 있게 마련이라는 고정관념에 길들여져서 습관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여러분! '삶'이라는 것이 고통의 연속이기는커녕 '날마다 축제'일 수도 있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일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라며 오히려 반론을 제기하겠지요...
하지만 여러분! 삶은 축제일 수 있습니다. 죄, 질병, 빈곤 같은 것에 질질 끌려 다니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복과 평화 속에서 이 삶의 강을 건널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우리들 외부의 어딘가로 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나와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인식, 즉 우리가 주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서 가지는, 그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참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진정한 길입니다.
인간과 세상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바라보는 세계관은 개인이나 국가의 존립에 두려움을 조장하게 마련입니다. 날이 갈수록 전쟁과 파괴적인 힘을 가진 여러 형태가 발전됨에 따라, 이러한 두려움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고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더욱 가공할 만한 것은, 물질적인 파워의 끝판왕은 더욱 발전되고 확산될 것입니다. 요즘 최첨단 AI 인공지능에 관해 여러 성도님들도 많이 들어 잘 아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물질로 바라보고 해결하려 한다면 희망은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세계를 영적으로 바라보고 인식해야 합니다. 영적인 의식을 갖고 살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안전, 조화, 건강, 풍요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과 우주를 물질로만 보는 것에서,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영'의 실재를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근본이치를 터득한 사람, 성령의 깊은 체험을 한 사람들은 그 뿌리가 튼튼하여 세상 풍파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리 쏠리고 저리 밀리면서 어렵게 살아오셨지요?
온 세계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고전 2:11-12 /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들의 인생 여정의 중심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삶을 아름답게 열어가는 열쇠가 됩니다.
우리가 잘 깨닫고 우리가 전해야 할 가장 기쁜 소식이 바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이런 생각을 하였을지 모릅니다. '왜 나는,이 꼬라지일까?'라고 말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자로 여기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자신의 주의를 두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결핍되어 있는 자신, 무언가 모자라고 형편없는 자신, 무언가 계속 더 채워 넣지 않으면 다른 이들에게 무시당할 것 같은 초라한 자신, 한스럽게 살아와서 후회와 미련과 아쉬움과 죄책감과 수치심과 분노에 어쩔 줄 모르는 작은 자신의 모습에 계속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그 여인인 예수를 온전히 만나고, 초라하게 느끼는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그녀 자신의 생각, 행동, 선택, 삶의 방향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자신의 마음을 집중하게 되면서 영적 의식이 바르게 잡혀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는 생각대로 마음을 주장하는 감정대로 자기를 놓아두지 않고, 성령님이 자신 안에서 운행하고 계시다는 영적 의식을 얻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 영적 의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초라하게 여겨지기만 했던 자신의 고방식을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모든 시대를 통하여 밝혀지고 계시된 하나님의 영, 온 우주에 아니 계신 곳이 없고 온 우주를 관통해 계시고 우주를 떠받치고 계시며 그녀 자신과 함께 계시며, 그녀의 몸을 성전 삼아 그 내면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이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 받으신 존귀한 자인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보시지요.
엡 1:17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사 11:1-2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마리아 여인이 이 엄청난 비밀을 깨닫고 온맘다해 사람들에게 전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께 진심으로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틀을 그 곳에 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 역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되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와 함께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더 듣고 싶었기 때문에, 머물러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틀 동안 그 곳에 머무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틀 동안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전혀 전하여 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의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요 4:41 /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사마리아에 이틀 동안 유하신 예수님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존재한 것은 "예수의 말씀" 이었습니다.
요 1:1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육신은 육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말씀이기도 합니다. 육신이 되더라도 그 본질이나 성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원인(말씀)은 결과(육신)로서 눈에 보이게 되지만, 육신의 본질이나 정수는 여전히 ‘말씀’이고 ‘영’이고 ‘의식’입니다.
이러한 지혜 안에서, 우리는 영적 우주와 물질적 우주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육화된 '말씀'이고, 눈에 보이게 된 '영'이며, 생각으로 표현된 '의식'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 세상을 지배해 온 모든 문제들은, 두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믿음이나 이론에 근거합니다. 하늘 왕국, 곧 영적인 삶이 따로 있고, 물질 세상, 곧 죽어질 존재가 따로 있다는 믿음이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바탕으로 깔려 있어 작동하기 때문에, 세상의 풍경들을 그토록 모순과 갈등과 문제의 연속으로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두 세계가 따로 있다고 인식하면서도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다른 세계, 곧 영적 세계와 접속하여 인간 세상의 부조화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물질적인 차원에 하나님이나 성령이 역사해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바로 그런 현상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이 문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인간의 그릇된 개념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현실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세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해하더라도, 우주는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건강과 조화를 가져오는 일은, 필멸의 우주를 없애거나 변화시키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관념을 고치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길, 하나님께로 가는 길,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삶을 사는 길을 추구하는 자는 한 가지 문제에서부터 자신의 탐색을 시작합니다.(여러 문제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가지 문제입니다.)
믿음의 길에 처음 들어선 자는 더 지고한 힘, 전능한 힘을 가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그리고 영적인 법칙이나 진리를 세상적인 환경에 적용함으로써, 부조화를 극복하려고 하고 병을 치유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때가 되면 믿음의 길에 처음 들어선 자는 인간의 문제에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지식을 적용하는 것이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혹여 듣는 일이 있더라도 언제나 듣는 것은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연히, 자신의 탐구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결국 믿음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되려면, 자신의 믿음이 더 크게 확장되고 성장해야 됨을 받아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전 2:14 /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영으로서의 삶은, 신령한 것들에 대한 생각에 몰입하고 헌신함으로써 누구나 기를 수 있는 존재에 대한 영적 감각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영적인 것들에 마음과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이 가정에서의 온전한 기쁨, 온전한 동료애를 맛볼 수 있고 성공적인 기업을 일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중심을 둔 사람들만이 어지러운 세상 한복판에서 안녕과 평화를 발견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롬 14:17 /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인간적인 문제에 봉착해 있다면, 그것이 어떤 문제이든,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려고 애쓰지 말고, 성도님 안에 성령이 현존해 계심을 실감하십시오! 권능의 성령님이 인간적인 모습을 녹이고 영적인 조화를 드러내십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먹이셨을 때, 풍요로움에 대한 그분의 영적인 의식이 빵과 물고기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셨을 때, 하나님아버지의 현존에 대한 그분의 느낌이 건강과 힘과 조화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골 3:2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영적인 우주에 살고 있지만, 영적인 우주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지각은 우리 앞에 제한된 그림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 세상'이라는 그림 위에만 있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에만 참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들어 올려서 우리의 맞닥뜨린 현실을 떠나자마자, 우리에게는 영적 실재를 보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자신이 한 일을 우리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가 예수님과 동일한 의식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가 가지셨던 믿음의 의식을 가지시고 행하셨던 일들이 지금도 가능하게 될 것이고, 그래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그 영적 자각을 기르는 일을 우리 성도들과 말씀 안에서 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설명할 터이지만, 우선 이것부터 실천해 봅시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머릿속에 그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홀로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지금 호흡하고 있는 나와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계속 의식하는 훈련을 한 주간 하고 오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숨을 들이마실 때 '예수가', 숨을 내쉬며 '내 안에'를 호흡할 때마다 속으로 읊조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침에 깨어나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님을 그날의 행위자로서, 알맹이를 채워주는 존재로서, 그날 일어나게 될 모든 것의 법칙으로서, 알아차리십시오. 여러분이 그날 만나게 될 하나의 힘•하나의 파워•하나의 에너지•하나의 현존으로서, 하나님을 알아차리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앎과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집중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성경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성취하게 해줍니다.
사 26:3 /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잠 3:5-6 /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하나님의 왕국은 더 많은 것들, 더 나은 것들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실상에 대한 더 많은 말들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영적인 깨달음의 열매는 더 큰 조화, 더 큰 번영, 더 큰 기쁨, 더 이상적인 동료애와 관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영적인 의미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성도 중요하지만 느낌이 아주 중요합하다. 성서의 말씀 또한,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적인 진실이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다른 기능, 곧 느낌을 통해서 작용하는 직관을 사용해야 합니다.
영적 치유는 신성하게 밝아진 의식의 자연스러운 열매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에고를 벗어버리고 우리의 참자아에 대한 의식, 곧 우리 자신의 실재인 '하나님의 영'을 깨달아야 하고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성취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말씀을 믿는 믿음, 말씀에 근거한 믿음, 그것이 바로 예배와 생수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의한 부흥이 일어날 때, 현저한 현상은 무엇입니까?
요 4:42 /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사람들은 메시야, 그리스도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 메시아는 '구세주'가 파견한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 구원을 실행하고,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그 자신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구세주',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고백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 '세상의 구주'는 로마 황제에게 적용이 되었던 말입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었던 1세기 중엽 이후, 기독교를 박해하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구세주라고 부르며, 시민들에게 그렇게 부르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요한복음 저자가 이렇게 기록하였다는 것은 반란이었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왜? 이런 고백이 가능했습니까? 믿음에서 앎으로 나아갔기 때문이지요.
지금 그들은 분명, 로마 황제의 박해 가운데 사마리아는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고백합니다. 로마 황제가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주(소테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 분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참된 구세주가 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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