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성서는 건강한 상태를 뜻하는 ‘구원’과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다룬다. 다양한 성서가 어떤 면에서 같고 어떤 면에서 다른지, 또한 왜 다른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오랜 기간 이어진 성서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 될 것이며, 성서의 역사와 더불어 사람들이 읽고 이해한 성서에 관한 내용이 될 것이다.
Ⅱ. 몸 되는 말
1. 말씀하시는 하느님
타낙과 신약성서가 세계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고 세계 모든 도서관에 소장된 것은 19~20세기이다. 타낙에 느비임(예언서)에 속하는 크고 작은 예언서 21권은 오랜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이 말한 내용을 진실하게 담아냈다.
(참고 : 타낙은 유대교 성서를 구성하는 세 부분, 모세의 다섯 책인 토라와 예언서를 가리키는 느비임, 성문서를 가리키는 케투빔의 첫 히브리어 자음을 따서 만든 용어이다.)
구어, 입말이 우선하는 경향은 구전 전승을 바탕으로 하는 타낙과 신약뿐 아니라 세계 문학에서도 나타나 있다. 고대 세계는 문자 전승보다 구전 전승에 의존했다. 한 예로, 인류가 소크라테스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정보, 그가 전한 지혜는 소크라테스 본인이 직접 남긴 정보가 아니라 그의 제자들과 청중에 전한 간접 정보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와 예수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발화 시점과 그 말을 기록한 시기의 간극이다.
예수가 전한 말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첫 번째로 기록된 말은 전례에서 사용한 신앙 고백의 형식을 띠고 있으며 그 수도 적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두 유대교 집단,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 중 하나는 전승의 권위에 대한 문제였다. 바리사이파가 성서 분문의 권위뿐 아니라 전승의 권위도 인정했던 반면, 사두가이파는 원칙적으로 그러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기록된 토라 위에 ‘구전된 토라’가 있다는 생각은 탈무드에 수집된 전승 기저에 놓여 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했다. 루터와 칼뱅은 교회의 전통적인 성서 해석과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전승이 신성한 계시, 혹은 성서 기록에 비견할 만한 권위 있는 자료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구전 전승과 기록의 관계에 대한 물음은 설사 그 본문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인정하더라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주 오래 전부터 신성한 토라를 충실히 관리했던 유대교 서기관들은 스승이 제자에게 불러주는 글자 그대로, 문서 그대로 내용을 보존하는 전통을 이어갔다. 이 때 제자는 본문의 의미, 이야기와 관련된 스승들의 관습, 가르침과 관련된 다양한 전승도 전수 받았다. 이것은 토라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승 중 일부였고 이러한 전승 모음이 탈무드의 기초가 되었다.
우리는 전례를 행하는 자리에서 사용할 예언자들의 격언과 이스라엘 성현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외에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예배 전승도 받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편이다. 시편은 성서의 어떤 책보다도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유대교인도, 그리스도교인도 시편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시편에 담긴 노래들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은 수 세기에 걸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불러왔다. 서기관들이 시편을 기록하면서 예배 시간에 신도들이 노래하던 시편을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시편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입술로 노래 부르는 것은 기록에 선행하며 기록보다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된 성서, 심지어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우선한다는 점은 인간의 영혼과 언어의 본질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발화된 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고 그에 대한 찬사가 누적되자,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히 문법으로 이루어진 무언가, 의사소통을 위한 매체를 넘어 형이상학과 신비의 차원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요한복음의 첫 번째 구절에서 ‘말씀’이라고 번역한 그리스어 명사 λογος는 ‘말하다, 이야기하다’를 뜻하는 동사 λεγειν에서 유래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공통으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선언한다. 이 선언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그리스도교 신조를 분명하게 규정하는 뼈대가 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육신이 되셔서 인간으로 오신 분이 예수다 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다.
2. 히브리어로 된 진리
성서 이야기는 역사 연대기를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으며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토라, 즉 모세오경에는 하느님의 활동과 입법 과정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이후 성서 진술의 기초가 되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여기에 속한다. 실질적으로 토라는 이스라엘의 기원을 다룬 책으로 볼 수 있다.
느비임은 유대교에 따르면 총 8권, 그리스도교의 경우는 이 8권을 다시 나누어 21권이다. 느비임에 속한 역사서는 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가 있는데, 전기 예언서라 불리기도 한다. 대예언서에 해당하는 책들은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다. 12권의 소예언서는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소예언서로 불린다. 타낙에는 소예언서가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니야서, 학개, 즈가리야서, 말라기서가 여기에 속한다.
케투빔(성문서)을 이루는 대표적인 시가 문헌은 시편, 잠언, 욥기이다. 케투빔을 이루는 두 번째 그룹은 메길롯(두루마리들)이라 불리는데, 아가서,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서가 여기에 포함된다. 마지막으로 케투빔에 포함된 문헌은 다니엘서, 에스라서, 느헤미야서, 역대기 상⸱하이다.
토라, 느비임, 케투빔이라는 타낙의 구분은 은연중에 정경화 역사를 반영한다. 토라는 가장 먼저 정경이 되었은 것이고, 그 다음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기록의 형태로 모아 놓은 느비임이 정경이 되었을 것이다. 정경 문헌이 가져야 할 내용과 관점이 다소 불명료한 글들은 마지막으로 모여 케투빔이 되었을 것이다. 정경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기원 후 90년, 혹은 100년경 얌니아에서 랍비 회의가 열려 정경 목록을 확정한 이후이다.
3. 그리스어로 말하는 모세
그리스어는 자신을 문명화된 세계라고 여기던 사회에서 통용되던 공용어였다. 성서 히브리어가 유대 팔레스타인에서조차 점차 다른 세상의 언어가 되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히브리어 대신 아람어를 쓰기 시작했다. 아람어와 히브리어는 언어학적으로 같은 계열에 속해 있으며 유사한 문자로 기록되었고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지중해 인근에 모여 살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인들이 아닌 이들도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거주한 지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후 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신플라톤주의 이교도 철학자들 및 유대교 사상가들과 활발하게 지적인 교류를 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알렉산드리아는 교육의 중심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과 성서 연구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신학자들을 길러냈다.
유대인들이 무엇을 믿는지 궁금해 하던 이방인들의 호기심을 해소해 주기 위해, 또한 이스라엘 밖에 흩어져 살면서 더는 히브리어를 읽을 수 없게 된 새로운 세대의 유대인들이 성서를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70인역 성서(ⅬⅩⅩ)’가 만들어졌다. 70인역 성서의 번역은 짧은 기간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두 세기,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70인역이 탄생함으로써 성서는 세계문학의 일부가 되었다. 유대교 신앙이 세계 종교로 탈바꿈하는 데 70인역 성서가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유대인들이 번역한 70인역 성서의 가장 큰 혜택을 입은 대상은 유대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교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만의 종교였던 유대교는 기조를 완전히 바꾸어 이방인들과도 함께 모여 토라를 나누고 쉐마를 암송하는 포괄적인 공동체가 되었다. 그 결과 유대교는 지중해 세계 문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세계 종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4. 기록된 토라를 넘어서 : 탈무드와 계속되는 계시
유대교에서 외경은 ‘경전 이후에 나온 경전’이라 불리며 히브리어 타낙 정경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외경은 70인역 ‘정경’의 일부로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겨회 성서에 포함되어 있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외경을 부차적인 지위에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 대부분의 시기 절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외경을 성서의 일부로 여겼고 여전히 그러하다.
외경에는 예레미야서, 에스델서, 다니엘서의 추가본뿐만 아니라 토비트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 바룩서, 상⸱하권으로 된 마카베오서가 있다.
토라는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야기하신 내용, 모세를 통해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이다. 모세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내용 중 일부를 토라에 기록했고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러나 기록하지 않은 채 구전 형태로 남은 것도 있다. 신앙공동체는 내용을 전달 받는 과정에서 기록된 토라와 구전 토라를 모두 존중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타낙 본문에는 히브리어 자음만 기록되어 있으나, 아주 이른 시기부터 타낙의 자음에 어떤 모음이 가장 적합한지를 논하는 구전 전승이 존재했고 오랜 기간 동안 선셍은 학생에게 이를 전달했다. 마소라 학파로 알려진 학자들은 6~7세기 자음으로만 기록된 성서 본문에 모음 부호를 적어 넣었다. 그들은 암기와 암송을 거듭하면서 기억해 여러 세대에 걸쳐 전달되어 온 전통을 깊이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했다.
주석(commentary)과 전례(liturgy)라는 두 가지 길은 서로 매우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서로 보완하며 시대마다 성서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다.
5. 이루어진 율법과 예언서
그리스도교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근본 범주는 예언과 성취인데, 이 범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 전체를 통틀어 적용되었다. 구약성서에 수록된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따른 여러 사건을 통해 온전한 의미를 갖는다.
타낙을 그리스도교 성서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고대 이스라엘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주창자와 옹호자는 예언자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그리고 훌륭한 혈통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기원 후 1세기,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 기간에 그리스도교 복음은 명백히 새로워졌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그 모습은 새로웠으나 실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인류사에서 처음 등장한 종교, 가장 오래된 종교가 되었다. 하지만 기록된 토라만큼 구전 전승을 중시하고 이것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권위를 갖는다고 본다면 예언과 성취에 대한 이 거대한 주장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그리스도교는 구전 전승을 포함하거나 전부를 사용하지 않는, 기록된 성서 고유의 권위를 발전시켜야 했다. 그 발전의 결과 권위를 얻게 된 기록된 성서를 오늘날 우리는 신약성서라 부른다.
6. 두 번째 언약의 향성
구약과 신약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성서는 치음에는 그리스어 성서였고 이후에는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교 성서에서 신약성서의 분량은 구약성서 중 시편과 대예언서를 합친 분량보다 적을 만큼 구약성서보다 한결 얇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확산되면서 신약성서는 적은 분량에 비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약성서는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진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들의 총서라고 할 수 있다. 네 권의 복음서는 예수의 인격, 가르침을 전한다. 사도행전은 예수의 부활부터 바울로의 선교가 다다른 시기까지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다룬다. 서신서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다양한 지도자들이 쓴 편지 글 모음집으로 대부분은 바울로가 썼다. 서신서의 주된 관심은 교회가 전한 메시지를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처한 문제, 그들의 필요에 적용하는 데 있다. 요한계시록은 초기 그리스도교 운동에서 펴냈던 묵시문학이라는 장르에 속한 문헌 중 유일하게 정경으로 채택되었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27권의 책들은 책에 나오는 사건 전반에 걸쳐 자신들과 함께하신 하느님을 고백하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 쓰였다.
신약성서에서 복음서가 차지하는 위상은 타낙에서 토라가 차지하는 위상과 같다. 복음서와 토라 모두 기본적으로 구원 사건, 이 땅에 임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증언하며 이를 따라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토라의 중심 사건이 이집트 탈출이라면 복음서의 경우 중심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를 그린 네 개의 서로 다른 초상들은 신약성서를 이루는 나머지 문헌들의 바탕이 되었다. 토마의 복음서와 필립보의 복음서 같은 외경복음서도 있다.
사도행전은 루가복음서의 연장선상에서 기록되었다. 이 문헌은 특히 사도 바울의 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와 서신서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사도행전은 때때로 도외시되었고, 요한의 복음서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와 견주었을 때 그리 많이 논의된 문헌은 아니지만, 신약성서에서 타낙의 역사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서신서를 읽는 이들은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서신서는 신약성서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문헌이다. 신약성서 27권 중에서 21권이 서신서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서신서는 1세기 그리스도교 특정 공동체의 특별한 필요에 의한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한 편 혹은 두 편 이상의 서신은 여러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쓴, 일종의 통문이다.
로마서는 바울의 가르침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낸 서신이다. 고린도전서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괴롭혔던 몇 가지 문제를 다룬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는 내용과 고린도 공동체가 보여 준 관대함을 칭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사도권 변호를 주요한 주제로 다룬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두 문헌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질에 관심을 집중한다. 빌립보서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신앙과 경험을 고백하고 이를 바탕으로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인의 소명을 실현하라고 권고한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데살로니가 교회와 바울의 관계를 기술하며 동료 그리스도인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이야기하고 위로한다. 데살로니가후서는 그리스도가 도래할 때 앞서 일어날 일들, 특히 적그리스도의 발흥 등 몇 가지 사건을 기술한다. 그리고 성실과 근면을 권고하며 마무리된다.
목회서신은 바울이 두 젊은 동료, 디모데와 디도에게 보내는 조언을 담고 있다. 빌레몬서는 주인 빌레몬에게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변호하고 그를 친절히 대해 달라고 요청한다.
히브리서는 알렉산드리아 유대교의 특징인 토라 읽기 방식에 많은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계승자임을 정교하게 논증한다.
신약성서의 나머지 일곱 서신은 흔히 한데 묶여 ‘공동서신’이라고 불린다. 야고보서는 하느님이 값없이 은총을 주셨으므로 모든 선한 행위는 쓸데없다는 관념과 부단히 싸운다. 베드로전서는 하느님의 유산을 받게 될 그리스도교인의 특권을 묘사하면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격려한다. 베드로후서는 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에게 맞서 그들의 이단성을 지적하고 그들이 맞이할 끔찍한 운명을 말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경고를 보낸다. 유다서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와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있다.
에우세비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의 글을 읽으면 4세기 중반 즈음에 논란이 된 책들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오늘날 그리스도교 성서에 수록된 신약성서 정경 목록이 거의 굳어졌음을 알 수 있다.
7. 성서의 백성들
성서 원어와 라틴어의 간극을 메워서 확정적인 역본을 만드는 과제를 떠맡은 이는 4세기 말에서 5세기에 활동했던 에우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였다. 히에로니무스는 번역 초기에 70인역을 대본으로 택했으나, 유대교 랍비들이 70인역의 번역 오류를 지적하며 이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교 성서 해석을 비판하자 히에로니무스는 이에 자극을 받아 더 깊이 성서를 연구했다. 교황 다마수스의 요구에 따라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어 원어에 바탕을 둔 히브리 성서를 새롭게 라틴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고 신약성서를 옮길 때는 그리스어 성서를 활용했다.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성서를, ‘통속적인’이라는 의미를 가진 ‘불가타’ 라고 불렀는데, 이후 천 년 동안 이 불가타 성서가 유럽의 성서로 자리 잡았다.
성서 본문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결정적인 단절을 초래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히브리 성서, 또는 구약성서를 유대교의 경전이 아닌 그리스도교의 경전으로 간주했다.
라쉬, 토마스 아퀴나스 등, 성서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뜻은 문자적 , 문법적인 의미이며 모든 영적인 의미는 문자적 , 문법적 의미에 부합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보았다. 문자적 의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주장은 원어로 된 원문을 탐구해야 한다는 논리적 귀결에 도달한다.
중세에 학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 책은 성서였다. 성서 연구는 당시 학문의 절정을 담아냈다. 성서의 언어와 내용은 중세 사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문자는 일어난 일을, 은유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도덕은 무엇을 해야 할지를 , 신비는 지향해야 할 바를 가르친다.’
성서 해석 외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또 다른 점은 시각 예술이다. 그리스도나 마리아의 이콘(특히 동방) 혹은 성상(특히 서방)은 성서를 요약한 것으로 그리스어나 라틴어, 혹은 어떤 언어로도 성서를 읽지 못하는 많은 이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7세기 초 이슬람교가 세 번째 ‘성서의 백성’으로 발흥하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통의 성서와 각 종교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슬람교의 ‘성서’는 오직 꾸란 뿐이다.
8. 원천으로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완전한 과거(현재 존재하는 과거, 아니면 적어도 그리스와 라틴 고전,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서에 대한 자신들의 작업을 통해 바라볼 수 있게 된 과거)에 눈길을 돌림으로써 교육과 문학, 철학, 신학을 혁신하려 한 이들)
고대를 재현하고자 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꿈이자 그들이 내세운 표어 ‘원천으로’는 풍요로움과 깊이를 얻었다. ‘원천들은’ 고전 작품, 성서 시대의 문헌뿐 아니라 그 이후 시대까지를 아우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그리스도교 문헌, 히브리어로 쓴 산문과 운문, 희곡과 연설문을 아울렀다.
요한네스 구텐베르크의]가 창안한,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 기술로 인해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인쇄된 책의 시작이 성서였다.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번역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쇄술은 성서의 역사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원천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성서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은 그리스어의 복원뿐 아니라, 히브리어 성서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어 신약성서보다 훨씬 더 오래된 유대교 히브리어 타낙 인쇄본이 나오자 그리스도교의 원천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히브리어의 복원으로 히브리어를 익힌 그리스도교인들은 타낙의 히브리어 본문뿐 아니라 탈무드, 미쉬나, 카발라 본문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유대교 카발라의 핵심주제인 YHWH, 성서의 형이상학과 존재의 궁극적인 신비를 푸는 열쇠였던 하느님의 이른 네 글자는 삼위일체 교리라는 그리스도교 고유의 궁극적인 신비에 다가가는 열쇠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르네상스 시기 가장 유명하고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성서 인문주의자였다. 에라스무스는 수많은 세월의 무게를 떨쳐내고 성서에 담긴 참된 메시지를 발견하려면 원자료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라스무스의 신약성서는 성서의 역사에서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그리스어 신약성서 개정 작업이 지속되는 신호탄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성서학자들이 이룬 고대 그리스도교 복원이 남긴 유산 중 가장 오래 지속된 것은 성서 읽는 방법의 기초로 聖(성)문헌학과 문법을 강조한 것, 즉 문자적인 의미를 가장 중시한 것이다.
9. 오직 성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수 세기에 걸쳐 전개된 성서 역사를 이루는 무수한 장 가운데서도 가장 주요한 장이다. “에라스무스가 낳은 알을 루터가 부화시켰다.”고 할 정도로 종교개혁이 강조했던 ‘말씀의 힘’이란 교회와 전통이라는 억압적 권위에서 해방되어 인간의 정신과 삶에 직접 작용하는 ‘성서 메시지의 힘’을 뜻하고 ‘해방’은 에라스무스와 같은 성서 인문주의자들이 성서를 원어로 복원하고 배굽해 사람들이 성서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게 했기에 가능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육에서는 교회법이나 전례학과 같은 전통적인 과목들보다 성서를 절별로 주해하는 훈련을 더 중시했다. 종교개혁가들이 생각한 지적인 교역자는 성서언어를 잘 익혀서 신구약에 대한 지식을 습득해 이를 바탕으로 강해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목자를 뜻했다.
중세에는 교회와 성직자의 지도 없이 혼자 성서를 읽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일인지 경고했으나, 종교개혁 시기에는 개인이 성서를 주중에 읽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인쇄된 성서 덕분에 강해설교의 수준이 향상되었고, 루터는 직업 종교인뿐 아니라, 누구든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읽고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개혁의 산물인 인쇄된 성서들의 역사를 살피면 독일어 성서에서 영어성서로, 자연스럽게 전이가 일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영어 성서 중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한 성서는 이른바 ‘킹 제임스 바이블’이라 불리는 1611년 흠정역 성서다.
종교개혁 시기에 성서는 정치, 문화에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 시기는 로마 가톨릭 성서 역사에서도 커다란 전환이 일어난 때라고 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성서해석뿐 아니라 정경의 범위에 대해 이견을 낳았고 이러한 견해차는 결과적으로 서방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가속했다. 오랜 기간 이어졌으나 공식적으로 해결되지 않았던 갈등이 종교개혁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성서는 교회와 전통에 대항하는 무기로 쓰였지만 실제로 그 무기를 보관한 무기고는 ‘교회’였으며 이를 보존하고 보호하는 것은 ‘전통’이었다.
10. 정경과 비평가들
인쇄된 성서로 말미암아 성서를 사용하는 유대교, 로마가톨릭, 프로테스탄트에서 엄청난 발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대교의 성서연구는 독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는데, 유대교 학자들은 대단히 이른 시기에 최초의 히브리어 성서뿐 아니라 성서 이후에 나온 히브리어 본문, 아람어 본문을 책으로 출간했다.
종교개혁 이후 오랜 시간 로마 가톨릭의 성서 연구는 개신교의 성서 연구를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대한 성서고고학의 연구 결과를 출판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영향을 미친 북유럽과 영국에서 성서학은 중세대학이 근대대학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산물임과 동시에 근대문화로 지적 전환이 일어나게 한 주된 동력이었다.
종교개혁 교리를 대표하는 신앙고백은 말한다. “모든 종교 논쟁, 공의회의 모든 결의, 교대 저자들의 견해, 개인의 정신을 검토하고 결정하는 것은 오직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이다.”
유대교와 서방 그리스도의 두 갈래, 곧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안에서 계몽주의 학자들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성서에 역사비평 방법론을 적용하는 연구에 착수했다. 세 전통에서 성서에 역사비평 방법을 적용했을 때 일어난 논쟁을 살피는 것은 각 종교 전통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근대 문화와 종교에서 성서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열쇠다. 처음에 각 전통은 역사 비평을 적용했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17세기와 18세기뿐 아니라 오랫동안 세 종교 전통은 모두 역사 비평을 커다란 위협으로 간주했다. 역사비평에 있어 개신교 성서학은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제믈러를 비롯한 개신교 비평가들이 행한 지속적인 작업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역사적 검토를 피할 수 없는 성서에 대한 특정 결론이 아니라 성서를 분석하는 학문적 연구 방법론, 혹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방법론을 성서에 적용하는 것의 정당성을 항구화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몇몇 개신교 교파에서는 이러한 방법론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역사비평이 제시한 답뿐 아니라 질문 자체를 거부하는 이른바 ‘근본주의자’들이 나타났고 이로 인해 다시금 분열이 일어났다.
역사비평을 통해 더 큰 위기에 내몰린 것은 성서의 신뢰성이었다. 성서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은 자연과학뿐 아니라 역사신학에서도 일어났다. 18세기, 19세기는 인간 삶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는 데 역사 언구가 열쇠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던 시대였다.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교 교리사를 신학을 바르게 진술할 수 있게 해주는 적절한 도구로 여겼다. 계몽주의는 군주제와 같은 정치 체제, 교황제와 같은 교회체제부터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법률과 문학, 심지어 성서를 포함한 모든 고대 문헌까지 모든 전통의 문헌과 모든 형태의 전통을 비판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았다.
11. 인류를 위한 소식
18~20세기 문화에서 성서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유럽과 미국에서는 비평가들이 성서 메시지를 학문적으로, 사변적으로 해체하면서 그 권위가 실추되었지만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성서가 새로운 언어로 번역됨으로써 수천, 수백만의 독자가 생겼다. 주의 이름과 그의 말씀을 근동과 유럽의 경계를 넘어 온 세상에 나가서 만민에게 전파한 것은 그리스도교였다.
종교개혁 이후 영어권 세계에서는 특히 성서의 보급량이 급격히 증가했다. 지금까지 미대륙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영어 성서는 제임스 흠정역이다. 20세기 미국에서 출간된 주요 영어 성서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제임스 흠정역을 개정한 것이다.
19~20세기에 성서는 수없이 많은 역사소설과 영화의 소재로 쓰였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당대 독자들과 관객들이 이미 성서의 이야기를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 시기에는 많은 미국인들이 교회와 주일학교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들도 성서를 읽었다.
19~20세기를 거쳐 미국에 성서가 광범위하게 보급된 결과 미국은 신앙의 바다에 뒤덮였다. 성서를 대중에게 가장 광범위하게 보급한 기관은 영국성서공회,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 후 생겨난 수백 개의 성서협회였다. 미국의 또 다른 성서협회인 기드온협회는 모든 호텔 객실에 성서 1권을 비치하는 운동을 펼치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 협회에서는 1992~93년 38,000,000부를 보급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통계는 미국 개신교 문화와 신심에서 성서가 어떠한 입지를 갖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이다.
그리스도교 초기, 즉 칼과 화살의 시대에 그리스도교들이 성인의 유물을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았듯 개신교인들은 때때로 인쇄된 성서 그 자체를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성서의 문자적인 해석을 옹호하는 이들이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근본>이라는 소책자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개신교회에 있는 ‘근대주의자’ 들에 맞서 우주의 창조가 6일 동안 일어났다는 가르침과 동정녀 탄생과 같은 교리를 옹호했다. ‘근본주의’라는 말이 계속 쓰일 정도로, 몇몇 개신교 교단에서 근본주의는 성서영감설과 무류성을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교리로 삼으려는 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성서의 고유성과 권위를 위태롭게 하는 모든 학문적인 시도, 성서의 가르침을 과학적 세계관에 부합하게 하려는 모든 시도를 거부한다.
19세기에는 노예가 되어 신세계로 아프리카인들뿐 아니라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 오대양 섬에 사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성서의 잠재적인 독자가 되었다. 서양 문화가 이른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통해 세계 도처에 세력을 확장할 때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곳곳 마다 복음을 , 곧 복음서와 성서를 전했다. 성서는 전례 없는 수준과 속도로 번역되었고 이윽고 수백, 수천 개의 번역본이 나왔다.
고대의 ‘세계’는 지중해를 둘러싼 그리스-로마 세계를 넘어서지 않았다. 중세까지만 해도 세계는 그리스도교 유럽을 가리킬 따름이었다. 그러나 19세기와 20세기, 선교사들은 유럽과 아메리카를 넘어 세계 모든 곳에 성서를 전했다. 그러나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성서가 독특한 지위와 권위를 획득하자마자 유럽과 아메리카, 특히 지식인 가운데에서 성서의 위상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성서를 여러 종교 경전들이 모인 판테온에 놓았다.
한편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러시아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동부유럽과 중부유럽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한 승리 가운데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은 가정, 학교, 교회에서, 더 나아가 모든 세대의 집단 기억에서 성서의 존재를 지우는 운동을 시작했다. 소비에트 헌법은 공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지만 실제로는 성서 출간을 금지했으며 성서를 읽는 사람들 처벌했다. 그들은 성서와 ‘문맹인의 성서’였던 이콘을 미신의 잔재로 격하했다. 구약성서가 수록된 독일어성서가 계속 출간되긴 했지만, 구약은 사실상 성서의 권위를 잃어버렸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토라 코덱스와 두루마리는 탈무드와 함께 파괴되었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19~20세기는 ‘성서의 백성들’ 안팎에서 성서학의 황금기였다. 성서 연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1940~50년대 쿰란에서 발견된 사해문서였다. 사해문서에는 다른 필사본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성서 필사본이 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이 필사본은 그때까지 인류가 갖고 있던 본문보다 오래된, 마소라 모음 부호 이전 시대에 작성된 타낙 필사본이었다. 사해문서의 발견은 히브리성서 본문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신약성서와 함께 토라와 느비임, 케투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논란을 야기했다.
개신교에서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이후로 히브리어, 그리스어 원전을 통한 성서 연구가 고유한 요소로 자리 잡았고, 이는 영국과 독일,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각지의 대학 신학부, 신학교에 필수 과정으로 정착했다. 20세기에 나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서 주석 중, <앵커 바이블>은 유대교, 개신교, 로마 가톨릭 학자들이 협업하여 나온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965년 11월 18일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포한 <하느님의 말씀>, 즉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은 <성령의 영감>에서 제시한 권고들을 충실하게 보완했다. 공의회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성경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길은 넓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교회에게 버팀과 활력이” 되는 “힘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성서의 역사에서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 모두를 빚어냈다.
12. 성서 안에 있는 낯선 신세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폭발적인 성서 주석은, 바로 칼 바르트의 로마서이다. 이것은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떨어진 폭탄’으로 불리며 그들의 놀이를 거칠게 방해했다. 바르트는 역사비평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성서 안에 있는 낯선 신세계’라고 부른 초월적인 현실을 가리킴으로써 ‘거기와 여기의 차이’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역사비평 방법론을 넘어섰다. 비슷한 시기 유대교 성서학자 마르틴 부버는 토라를 새로이 번역하고 주해했다. <나와 너>의 저자였던 그는 바르트가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근대 타낙 연구에서 유행하던 탈무드와 역사비평의 대립구도를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세속 시대에는 더더욱 성서가 냉소주의에 대한 궁극적인 해독제이자 시인과 철학자, 화가와 음악가, 나아가 매일 틈틈이 성서를 살펴보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이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끊이지 않고 등장한 현대어 성서, 특히 영어 번역본은 문학적 아름다움은 물론 정확성 면에서도 이토록 오래된 본문이 이토록 새로울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성서는 언제나 독자를 매혹하는 힘을 갖고 있다. 실제로 성서를 열심히 읽는다면 그 때 맞닥뜨리게 되는 세계는 회당이나 교회를 거쳐 만나는 세계보다 훨씬 도 낯설며 훨씬 더 충격적일 것이다.
외국어로 가득한 성서 문헌 중에서도 가장 낯선 문헌은 묵시문학에 속한 문헌들, 즉 에스겔서와 다니엘서, 요한계시록일 것이다. 이 문헌들의 저자는 일정한 의도를 담아 썼을 것이다. 당대의 독자에게 당대를 넘어선 미래의 독자에게도 일정한 의미를 갖기를 바랐다. 오늘날에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막론하고 이 문헌들에 대한 온갖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본문의 뜻을 명료하게 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해소되지 않는 성서 본문의 낯섦을 보여준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더 성서 본문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위대한 성서 주석가들은 성서 본문이라는 표면 아래 있는 낯선 세계와 느낌을 발견하고 이를 드러내는 방법을 익힘으로써 관습적이고 평범한 주석을 뛰어넘었다. 이는 알레고리 해석, 곧 ‘영적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 이면에 깔려 있는 원리이기도 하다.
신약성서 전반에 흐르는 하느님의 약속은 교회를 가리키는 은유인 ‘그리스도의 몸’에서 정점에 이른다. 손이나 눈이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몸에 속할 때만 각각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듯 교회의 ‘지체’는 교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신약성서는 타낙 이상으로 끊임없이 개인이 아닌 교회공동체, 교회를 강조한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성서를 ‘공동체’라는 틀로 바라보는 것이 장애물이 아니라 해방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은 역사에서 일어난 무수한 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 성서는 우리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동시에 숨어계시는 분,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전적 타자로 존재하는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낯선 신세계’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이사야 55:8~9)
하느님의 존재와 활동은 ‘우리가 바라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하다. 성서에 따르면 하느님의 존재는 전적 타자다. 그러나 이 전적 타자인 하느님, 초월자를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선포했다.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사야 7:14)
그리스도교 성서 마지막 책의 저자는 이사야의 예언을 풀며 자신의 환상을 보여주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계시록 21:3~4)
성서에 담긴, 성서가 증언하고 고백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만날 때 ‘나’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다.
Ⅲ. 나가는 말
성서는 하느님의 책이며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성서를 전유(專有)하지 못한다. 신약성서가 주장하듯 타낙의 목적은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딤후 3:16) 데 있으며 신약성서의 목적은 자기 스스로 증언하듯 ‘사람들이 (자신을) 믿게’(요 20:31) 하는 데 있다. 성서에 담긴, 성서가 증언하고 고백하는 하느님의 말씀과 만날 때 성서를 읽는 ‘나’는 주체가 아니라 객체다.
70인역부터 오늘날 가장 생소한 언어로 번역된 성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가 성서를 읽게 하려고 힘을 기울인 이들은 바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구성원이었다.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려는 종교적인 열망은 성서가 말하는 바를 이해하려는 역사적, 문화적, 문헌학적 욕구보다 언제나 더 중요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유대교 회당과 그리스도교 교회, 곧 시나고가와 에클레시아에서는 언제나 성서 본문 연구를 자신들의 특별한 과업으로 여겼다.
그러하므로 두 전통에서 ‘가르치는 과업을 맡은 사람들’은 성서를 가르칠 때뿐만 아니라 성서에 관해 배울 때 특별한 책임의식을 갖고 배움의 내용과 태도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성서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이들은 성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익혀야 한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전통은 모두 ‘성서를 거룩한 경전으로 대하고 이를 해석하기 위해 헌신하나 동시에 구분되는 두 개의 신앙공동체이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성서의 역사는 두 공동체 모두 성서를 통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다지고 일구어 왔음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두 공동체는 모두 본문 보전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수행할 뿐 아니라 새로운 상황 속에서 성서를 끊임없이 해석했으며 새롭게 해석한다.
온전한 인간이 되는 도정(道程)에 들어선 나, <성서, 역사와 만나다>를 읽으며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참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서를 통해, 기적의 빛이 열려있는 길로 언제나 나를 이끌어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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