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
고전 1:18-24
18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 /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1 /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할렐루야!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느 새 찾아온 9월 한 달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계절이 바뀌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9월은 한 해의 결실을 위해 새롭게 정비하고 구체화된 목적지를 향해 달려 나가는 그런 시기인 것 같습니다.
저는 특별히 이번 주간 굉장히 바빴는데요, 한 주 동안 설교를 5편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새벽에 드리는 매일감사예배와 또 수요예배 설교를 작성하면서 정말 정신없이 보낸 것 같습니다. 분명 열심히 설교 준비를 하고, 예배를 드렸는데, 뒤돌아서면 다시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그렇게 5편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출타해 계시는 담임 목사님께 장문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목사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어떻게 매일 설교를 하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딱 한 마디로 답장을 주시더라고요. "내공을 쌓거라..."
설교하는 것이 마치 부담인 것처럼 이야기가 되었는데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혹여 잘못된 이야기를 전할까하는 조심과 긴장은 있지만,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함께 성경 말씀을 통해 교감하고 짧은 설교 여행을 떠나는 것은 항상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특별히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말씀을 사모하시는 성도님들과 나누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즐거움을 알기에, 오늘 본문을 읽을 때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바울 사도의 간절함이 더 절절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고린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가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고 이후로도 여러 도시들을 다니며 개척을 할 때, 바울에게 고린도 교회의 소식이 들려오게 됩니다. 여러 문제들로 분쟁을 겪는 고린도 교회를 돕기 위해 바울은 그들을 훈계하고 권고하고 가르치는 서신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먼저 고린도 교회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린도라는 도시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이 도시는 고대에 주요 항구로 무역과 상업이 활발한 거대 경제 중심지였습니다. 여러 인종과 문화가 섞여있고, 오고가는 많은 물자와 사람에 따라 부와 명예, 성공이 뒤따르는 곳이었지요. 인종도, 종교도, 사회 경제적인 수준도 전부 다른 고린도 교회에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있는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십자가 사건에 관한 인식입니다. 기독교의 시작이자 지금은 우리에게 구원과 새생명의 상징이 된 십자가가, 당시로선 어떤 감정을 사람들에게 불러일으켰을지 한번 볼까요?
바울 사도는 고린도의 지역적 특성을 알았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신앙의 문제들, 가치관의 차이들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눈치 채지 못한 이기심, 즉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자신의 생각, 위치, 입장을 더 강화하려는 욕망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여전히 경쟁과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복음, 구원의 기쁜 소식에 대해 설명합니다.
각각 살아온 배경과 둘러싼 환경이 너무 다르기에, 연합보다는 분열이 더 쉬운 고린도 교회를 뭉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린도의 수많은 다양한 사람들 모두가, 기쁜 소식이라 느낄 수 있게 설득하기 위해 바울이 꺼내든 패는 무엇인가요? 각기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무척 매력적인 것이어야겠죠? 모두가 인정하고 무릎 꿇을 수 있는 가치가 필요한 때에 바울이 전한 것은 십자가의 도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전달한 매우 소중한 복음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린도 교회의 누구도 바라지 않던 내용이었습니다. 십자가라니, 어느 누구에게든지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최악의 형벌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23절로 24절의 말씀 다시 한번 앍도록 하겠습니다.
고전 1:23-24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말씀에는 독특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거리끼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스칸달론'이라는 그리스 원어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사용된 스캔들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는데요, 한국에서도 이제 많이 사용되는 단어죠. 추문 불명예라는 뜻을 지니며 누구도 아무도 그 대상이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흔히 연예계나 정계에 있는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소비할 때 많이 사용되곤 하는 이 스캔들은 감추고 싶은 은밀한 비밀이 남에 의해 파헤쳐지고, 소문이 나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런데 모두가 부끄러워하며 묻어두고 싶어 할 이 스캔들을, 오히려 바울은 결코 숨기거나 감추기 원치 않으며 오히려 소문나서 모든 이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이 단어, 스칸달론을 사용했을 때 원어의 직적접인 의미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걸림돌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도 있겠습니다. 즉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이고 이에 대한 고린도교인들의 감상은 어떠하였을까요?
요즘에서야 이러한 사형이나 형벌제도가 없으니 십자가 모양이 하나의 악세사리나 소품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이 십자가는 이천 년 전 당시 로마 제국에서 가장 흉악한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죄수의 손과 발이 못에 박힌 채로 나무 위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심지어 그 죽어가는 모든 순간이 사람들에게 전시되는 너무나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죽음이기 때문에 로마는 시민권자들에게는 이 십자가형을 가하지 않고 오직 반역자나 노예에게만 이 형벌을 내렸습니다. 십자가형은 단지 심리적으로 비참할 뿐 아니라, 말 그대로 손과 발에 박힌 못과 찢긴 상처에서 흐르는 피로 인해 피가 말라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잔혹한 방식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최악의 범죄자에게 주어지는 최악의 형벌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인종과 문화를 막론하고 누가 보던지 간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사건이 특별히 더 거리낌을 주었던 것은 그들의 오랜 믿음과 기대가 산산히 부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 표적과 기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모세처럼 다윗 왕처럼 힘과 능력으로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 또 적군의 목을 베어 나라를 굳건히 세우는 전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상처 입고 수난 당하는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배신한 예수를 그들의 오랜 율법대로 처리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무에 메달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라 낙인을 찍은 것입니다. 이처럼 무력하고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십자가로 처리하였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예수를 메시아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현상은 당대 최고의 철학가들이던 헬라인들이 보기에도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최고의 가치는 이성을 통한 합리적인 사고였는데 이 지혜는 그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성적 판단에 따르면 예수는 정의와 지혜의 법을 따라 처벌된 범죄자에 불과하였는데, 그 미련하고 실패한 사람을 믿고 따르면 구원을 얻는다니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복을 받아 이 땅에서 더 영광스러운 삶을 사는 것인데, 내 삶을 더 윤택하게 할 방법을 말하기는 커녕 오히려 초라하고 부끄러운 십자가를 바울이 자랑스럽게 전하니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하나님이 바울을 들어 이방인의 전도자로 사용하신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종인 바울이 아직 사울이었을 적,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로마 시민권자요, 뛰어난 학식과 종교적인 열심히 있었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를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과 생명의 진리를 선물 받는 다는 사실이 오히려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유대교를 무너뜨리려는 이단으로 판단하여 더욱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데 힘썼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에게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정신없이 질주하던 바울을 예수님께서는 멈추시고 그를 넘어뜨리셨습니다. 바울을 직접 만나신 예수님은 그에게 친히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걸려 넘어뜨리게 하는 스칸달론은 역설적으로 바울을 생명의 길을 완주하는 승리자로 변화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의 질주를 멈추게 하십니다. 겉으로는 신앙과, 믿음, 율법이나 선한 행동을 추구하면서도 이면에는 이 모든 것들을 도구삼아 내 비대한 자아를 확대하기에 바빴는데,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의 속마음을 간파하시고 그 발걸음을 멈추고 가야할 방향을 다시 설정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몆 등으로 달리고 있느냐는 불필요한 질문에 사로잡혀 의미 없는 경기를 치루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등수가 아니라 어떤 경기에 참여하였는지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하십니다.
나의 삶에 제동을 거는 십자가는 때때로 경기에서 1등으로 달리고 있는 나를 무너뜨리고 망치게 하는 걸림돌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방종하고, 금욕을 말하지만 억압적인 비뚤어진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잠시 우리의 걸음을 멈추고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십자가의 걸림돌이 필요합니다. 아무 고민 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 속에 큰 파동을 일으키는 십자가 사건은 날마다 묵상하고 기억해야 하는 하나님이 내주신 선물이요 숙제입니다. 십자가의 달리신 예수님을 보며 악과 사망의 권세는 자신들이 승리하였다고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사실 하나님의 큰 구원의 계획의 완성이자 시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과 구원의 계획을 알기에 자랑스럽게 십자가의 도를 전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4:10-11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죽은 줄 알았던 예수님은 다시 사셨고, 또 영원히 사십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도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십자가는 가장 약한 것이지만 도리어 가장 강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부정함으로 인해 지성소에 들어가지도, 거룩한 궤를 만지지도 못하고 만약 거룩하신 하나님의 상에 닿으면 죽을 수 밖에 없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전 그 자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스스로의 부정으로 인해 죽을까 두려워하던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세상에 전할 사명을 지닌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순복하시길 간구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시험에 통과하신 예수님을 따라 인생길을 달려가시는 사당중앙교회 되길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보내주신 큰 은혜와 사랑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의 역사가 있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가장 약한 것으로 가장 강하게,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녹이사 주의 자녀로 불러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 값없이 받은 선물에 감사하며 날마다 그 사랑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사당중앙교회 되게 하여 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교회에서 함께 사역하는 딸, 감신 동문(😊💖💕) 전도사의 설교문이다! 항상 딸의 설교에 큰 은혜를 체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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