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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실로암 맹인, 요 9:1-7, 은혜로운 전도사님의 설교

by tat tvam asi 2024.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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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암 맹인

 

요 9:1-7

요 9:1 /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 9:3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 9:4 /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 9:5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6 /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우리는 두려움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닌, 감염이나 질병의 대상으로 비춰지는 시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던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이 더 이상은 불가능한 시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답답함, 마음의 불안함이 타인을 향한 거센 비난으로 돌아가는 시대, 서로를 향한 혐오가 만연한 코로나19의 시대입니다.

 

질병이 휩쓸고 간 이 세상 속에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맞이하게 될까요? 아니, 어떤 미래를 그려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는 앞 못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한창 이야기가 벌어진 장면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9 2절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은 맹인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눈멀어 못 보는 이에게 따라서 일을 할 수가 없어서 구걸함으로 연명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제자들은 그를 돕거나, 복을 빌어주는 대신 그 병의 책임을 역추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이 사람들은 인권이나 윤리와 같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의식이 없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괴랄한 질문이지만, 그 당시 2000년 전 이스라엘에서는 제자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옛날에 우리 나라도 종종 질병에 관한 문제를 하늘이 내린 벌, 천벌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죄에는 마땅한 형벌이 따라야 하고, 질병은 곧 벌이니, 따라서 질병, 재난에 처한 자는 신이 벌하신 죄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맹인에게서 죄를 보았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건, 얼마나 힘들었던지간에 그 자는 죄인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맹인에게 신체적인 질병보다 아프게 다가온 것은 심리적인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평생에 걸쳐 결국 뿌리 깊게 내려앉은 죄인이라는 사회적인 낙인은 그의 모든 생각과 활동을 제약했습니다.

 

그 모습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크게 대답하십니다. 3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단호하게 죄와 질병의 고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거절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결코 병에 걸린 사람에게 그 병의 책임을 묻지 않으셨습니다“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라는 그 고백은 맹인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단 한 마디였을 것입니다곧 이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이십니다예수님은 맹인의 눈 위에 진흙을 발르고그에게 실로암에서 씼고 오라 말하십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그의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치유의 일병자의 소원을 알고 이를 위해 힘쓰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찾기 바쁘지요. 인과관계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것은 이성에 따른 판단력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때때로 나쁜 이기심이 숨어있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병을 보고 긍휼의 마음이 아닌, 책임을 묻는 비난의 마음을 품었던 것은 자기에게는 그 자가 지닌 질병에 있어 아무 상관이나 거리낄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한창 코로나가 확산되기 시작할 3월 즈음에 한 방송에서 외국인 패널들을 모아놓고 코로나에 대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여기저기서 코로나가 어디서 발생했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한 사람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발원지가 왜 중요해요?, 발원지가 아닌 발원 원인에 대해 질문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발원지는 병하고 상관이 없잖아요.

덧불여 그는 발원지를 찾는 이들에 대한 따끔한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발원지에 대한 집착은 그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행동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에 비해 훨씬 쉽다는 것을요. 사회적으로, 그리고 세계적으로 혐오와 차별에 대한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자 어린아이를 본받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긍휼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깍두기. 깍두기는 세모, 네모 모양이 다양합니다. 무를 자르다 남는 짜투리까지 알뜰하게 들어간 탓입니다.

 

아이들이 함께 뛰어노는 것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동네에서 아이들이 다같이 놀 때, 개중 어리거나, 덩치가 작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 누나, 언니, 오빠가 재밌게 노는데 참여하고 싶어서 꼽사리 낀 동생들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어리면 게임의 룰을 따라가기가 버겁습니다. 특히나 뛰고, 잡고 몸으로 노는 놀이를 할땐 더 그렇죠. 그때 특혜가 있는데, 바로 깍두기입니다. 깍두기는 게임에는 참여하나, 술래에 대한 부담은 없습니다. 편을 나눠 게임할 때 깍두기는 덤입니다. 팀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게 깍두기입니다. 

 

친오빠보다 3살 어린 저는 어렸을 때 항상 깍두기였습니다. 그게 너무 편하고 좋아서 놀이를 시작하기도 전에 제가 먼저 "나는 깍두기야" 라고 외친 적도 많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잠시 완화되었을 때에 교회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숨이 찰 텐데도 마스크를 낀 채로 정말 다양하게 놀더라구요. 달리기 시합, 숨바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재미있게 놀이를 이어가던 도중 그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친구가 술래가 되었습니다. 더 나이 많은 친구들에 비해 달리기가 늦는 탓에 술래가 되는 것에 부담을 보이며 술래를 안 하려고 하는 막내아이를 보며 저는 다른 아이들이 화를 낼 줄 알았습니다. 게임의 룰을 깬거니까요. 그런데 아이들의 반응은 제 예상과 달랐습니다. 쿨하게 “그래! 술래 안해도 돼. 내가 술래할게.” 라고 말하더라고요. 깍두기가 아직 죽지 않고 이어지고 있구나 이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집단입니다코로나와 같은 재난술래라는 부담이 닥쳐올 때 개인에게 그 책임을 묻고 질책하는 것은 예수님이 보이신 긍휼과는 반대되는 길일 것입니다맹인에게 죄가 없다라고 세상에 선포하신 예수님처럼가장 어린 아이 대신 술래가 되어준 어린이처럼비교와 비난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깍두기라는 여유와 사랑긍휼의 마음이 충만한 사당중앙교회 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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