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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악'(惡)에 대한, 나의 기록을 다시 보다...

by tat tvam asi 2024.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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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이들에게 듣는 질문 중의 하나가 바로, "악(惡)은 도대체 누가 만들었나? 성경의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시라면, 악도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것 아닌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도대체 악이 왜 존재하는가?"이다.

특히, 미증유(未曾有)의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몇몇 성도님들과 교회에 나오시지 않는 지인(知人)들에게 요즘 부쩍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말하는 ‘악(惡)’에는 거짓말, 강도나 살인 , 성폭력 등 악한 행위와 함께, 지진이 나 해일 등의 자연재해, 심지어는 질병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 등 자신에게 닥쳐오는 불행(不幸)마저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우울장애나 조현병 등 정신질환을 앓는 이들과 함께하는 가족들은 "왜 신은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라며 하나님 혹은 부모에게 원망을 퍼붓기도 한다.

결국 이 물음들은,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창조자라면 악은 어디서 온 것인가?" "하나님은 왜 악을 보고만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신정론(神正論)에 귀결된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당하는 많은 억울한 일들, 이유를 모르는 질병의 고통 등에서 악의 문제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바로 신정론에서 이런 고민이 발견된다. 이것은 우리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한계이기도 하다.

나는 악을 생각할 때 마음이 참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악은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아픔, 고통, 죽음, 범죄, 홍수, 가뭄, 지진, 쓰나미, 재앙, 질병, 가난, 두려움과 불안, 죄책감, 욕망 등의 심리적 어려움, 관계적인 어려움 등등이 모두 인간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므로, 나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떠남(대하 12:14)과 하나님의 언약을 어김(신 17:2),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 모두 ‘악’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악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악은 시대를 달리해오면서 다양한 의미와 맥락 속에서 여러 가지 얼굴로 나타났다. 악은 예수 시대에는 율법을 범하는 것과 사악한 충동으로 또는 로마에 의한 이스라엘 지배로 나타났고, 후에는 이 세상의 무상함, 성적 욕망을 지닌 육체 등이 악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국가 세력에 의한 우상 숭배 강요가 적그리스도의 표징이 되기도 하였고, 역으로 기존의 교회적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들 예를 들어서 중세의 이단자들 혁명가들 등 이 악을 상징한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른바 마귀 들린 자들, 마녀들도 악의 화신으로서 박해를 받았으며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탄과 마귀 등의 모습으로 상징화되었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히틀러나 아우슈비츠수용소, 스탈린의 독재,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등도 악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이에 대해 종교철학자 존 힉(John Hick)의 표현을 빌린 아우구스티누스의 의견을 본다면, 악한 사건들이란 하나 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자유를 잘못 오용한 데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인데...

하나님은 악에 대해서도 주권을 사용하시며 부정적 & 파괴적인 것들로부터 선한 것을 이끌어내시는 분이기에, 악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을 뿐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이해한 것으로 생각된다. 악은 단지 선의 결핍(선을 상실한 것)일 뿐 이라는 것이다. 악은 더 큰 선(善)을 위한 창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물리적 악에 대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과학 신정론(진화 신정론)에 대한 강의를 듣는 중에, ‘내가 그동안 John Haught의 Divine Kenosis로 나의 신정론을 설명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십자가’의 신정론으로 나아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참 평안과 온전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며, 세상적인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우리에게 열리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관계를 전심(全心)으로 설파(說破)하였다.

역경 속에서 인내하며, 미래의 불안으로부터 참 자유를 누리고, 일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었을 때 감사한 마음 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지식은 최고의 축복이다." 라고 이야기한 칼빈의 말처럼,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자리에 늘 서 있다.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과, 말씀 묵상하기,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기, 하나님의 음성 듣기, 깊은 마음 아뢰기 등을 같이 나누며, 하나님 안에서 그분과 함께 누리는 평화를 다양한 형태로 체험해왔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수백 가지의 위험을, 확신과 용기로 대처해 나갈 수 있었다.

인간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통해 그분의 섭리를 완전하게 펼치 실 것을 함께 나누며 말이다.

모든 피조물을 변함없이 붙드시고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동일한 비를 내리시며(마 5:45),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판의 백합화를 돌보시며(마 6:26-30), 우리의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세신 바 되신 분(마 10:30)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하지만 악의 근원에 대한 베일(veil)은 여전히 나에게 풀어내야 할 숙제가 아닐 수 없었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으로 이루어진다면 착한 사람에게 왜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라는 질문 을 받을 때,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탄의 장난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라는 말로, 책임을 사탄에게 전가하며 하나님을 변호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탄의 장난을 알고도 막지 않았다면 그 하나님은 과연 전지전능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뒤따르게 했다. 나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성서를 인용하여,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런 해석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 었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더 완벽한 신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초자연적 신은 악의 문제와 충돌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목회자의 돕는 배필로 3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수많은 어려움의 관문들을 통과했지만, 악의 기원에 대한 완전한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의 전능하심과 선하심 속에서만 악의 존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은 결코 악을 행하지 않으신다. 그러면서도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 즉 악을 행하지도 만들지도 않으시지만, 악이 존재하도록 주관하신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므로, 당연히 악이 존재하지 않도록 막으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악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허용하셨다. 그렇다면 악의 존재는 그분의 주권적 결정을 반영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 주권적 결정은 그분의 완전하심을 따른 일이 었기에, 우리는 악의 존재를 허용하신 그분의 결정이 선한 결정이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옳다고 여기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옳다고 생각해야 한다!" 는 것이었다.

나는 악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왜 악이 존재해야만 하는가도 알 수 없 었다. 하지만 인간 모두의 마음 안에 ‘두려움’과 ‘욕망’이라는 두 개의 기둥이 있음을 감지(感知)하고 있었다.

또한 악의 세력이 현저하게 드러나 이 세상에 큰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 악을 다스리시며 마지막에는 그 악이 소멸되리라는 것도 말씀을 통해 확신하고 있어왔다.

악은 언제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선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오묘 하신 섭리와 경륜 아래, 악을 최종적으로 정복하시며 우주에서 그 악을 제거하신다고 성경에서 분명히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바 로 이 약속의 말씀 안에서 나는 참 평안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하나님은 무책임한 창조주가 아니고 인간과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라는 절대적인 신뢰’ 안에서, ‘나 자신’에 대한 패러다임에 일대(一大) 전환이 일어났다. 양자물리학과 뇌 과학, 심리학과 영성을 같이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에, 학문 간의 대화를 통한 마음 챙김과 의식혁명이 내 삶에 전개 되고 있었다.

팬데믹(Pandemic) 시기를 지나오는 동안, 초자연주의의 문제를 사료(思料)하면서, 현대신학에서 말하고 있는 범재신론적(汎在神論的) 유신론(만유내재신론)을 살펴보는 시간도 가져보았다.

신이 모든 것(汎) 속에 존재(在)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일하시는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신은 자연과 세계, 그 리고 그 속에서 활동하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촉진시키는 분이라고 믿는다는, 범재신론적 유신론에 많은 공감을 하기도 했다.

신과 세계가 같다고 주장하는 동양과 스피노자 식의 범신론과는 다른 범재신론의 신은, 세계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기에, 그분은 ‘나’의 결정을 밖에서 일일이 간섭하면서 일방적 결정을 내리시는 분이 아니라, ‘나’의 결정에 귀 기 울이면서 ‘나’와 함께 동역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되었다.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나’의 외침을 들어주시는, 즉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성경과 삶 안에서 만나왔던 인격적인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마음의 확신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제 가장 중대한 변화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변화를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단일한 개체로서,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단일한 목표와 생각을 했었다면, 더 나은 것을 허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악’에 대한 나의 생각도, 과거라는 상자 안에 가둬 놓은 채,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서 읊조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상자는 원하면 언제든 나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와 예언자들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일방적으로 훨씬 큰 힘을 떨치는 그런 신학은 이제 점검을 해 보아야 한 다고 여기고 있다. 원죄 교리의 성서적 토대가 흔들림을 깨닫고 그것을 믿음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우리 인간은 망가지고 찢기고 죄 많은 세상에 태어나지만,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고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에 둘러싸여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다.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만유를 창조하시면서 자신을 주셨고, 무한한 사랑 으로 우리를 만드셨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동방 출신 서방 신학자인 이레니우스의 주장에 한 표를 던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악 이해에서는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완전성에서 이탈했으므로 그 이탈의 책임이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레니우스의 악 이해에서는 인간이 원래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성장을 필요로 하는 미성숙한 상태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 불완전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신 역시 책임을 진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이레니우스에 따르면, 인간의 타락도 미성숙한 데서 비롯된 시행착오라는 것이다.

힉은 이 이레니우스의 신정론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정론이 지닌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받아들이면서, 이 자연적 질서 가운데에 우리들 자신의 죽음과 역점과 취약함은 결코 아담의 죄에 대한 벌이 아니고 도덕적 책 임과 인격적 성장이 거기에서부터 비롯되는 신에 의해 설정된 상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니고 영혼의 형성의 장이며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곤란한 요구가 여러 가지로 부과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선과 악이 싸우고 있는 이 현실세계 속에서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성전(聖戰)에 참가하고 있다 는 것이다. 그것은 선에 의한 악의 극복이라는 싸움이며 이 싸움을 통해서 인간은 보다 완전한 상태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이레니우스의 악 이해는,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과정적인 존재로 이해하도록 함으로써 현실적인 악과의 대항이야말로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나는, "인간들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다." 라고 이야기한 이레니우스의 말을 벗 삼아, 앞으로 수많은 작은 변화들을 내 안에서부터 일으켜 나갈 것이다.

모든 일에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나 자신의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할 것이다. 악을 들여다보지 않고, 선을 들여다볼 것이다. 악에 집중하지 않고 선에 집중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기보다, 내가 바라는 대로 되어 있는 앞으로의 현실을 이야기할 것이다.

나의 '부족이나 결핍'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는 한, 자신의 소원과는 달리 건강 · 풍요 · 좋은 관계 · 성공 등이 자신에게 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본질을 초대하고 있는 것임을 명심할 것이다. 바라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서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정적이고 어둡고 우울한 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고 신나고 기분 좋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럴 때, 나의 삶에 아름다운 일들이 초대되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인생을 살기 원하고 미래를 두려움 없이 살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나의 입에서 ‘하나님의 말’이 나오게 할 것이다.

우리는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아로 있는 우리에게 엄마와 가족 · 주변인이 들려준 말을 듣게 되고, 어려 서부터 말을 배워 말을 한다. 우리가 아무런 의지를 발휘할 수 없을 아주 어린 시절, 우리의 부모가 혹은 할아버지‧할머니가, 또는 다른 어떤 양육자가 우리에게 한 말을 통해 ‘지금의 나’ 자신이 만들어진 것이다. 어려서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말을 하다 보니, 오히려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었는지 모른다.

우리의 생각과 말이 바로 우리 인생이 펼쳐지는 모습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다. 말은 표현되어진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발달시켜갈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를 지닌 '기술'은, 아마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가는 ' 기술'일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재빨리 그 상황을 파악한 다음,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을 신속히 결정한 후, 그것에 우리의 주의와 에너지를 집중하는 일에 능숙해질 필요가 있다. 기쁨을 주는 생각을 통해서 내면의 에너지를 일치시키자는 것이다. 생각 을 이끌어가는 훈련들을 통해 에너지를 한 데 모을 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망하는 일들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할 때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대개 사람들은, '바라는 것'이 오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와 동시에 '만일 그것이 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실망스러울까'라는 결핍에 관한 생각을 곧바로 시작하기 때문에,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을 스스로 허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럭저럭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

바라는 뭔가가 충분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사람은 항상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불편한 느낌을 편안함으로 완화시킬 방법을 찾아내고, 그것을 '희망'과 '긍정적인 기대'로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

생각을 통제하는 기술은, 단순히 행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준다. 우리의 지혜는 삶의 체험들을 통해서 얻어지는데, 삶의 체험들은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결과물인 것이다.

나의 삶을 뒤돌아볼 때, 아주 오랫동안 무언가를 원해왔었는데도 얻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요즘 확실히 알게 된 것인데, 내의 생각들이 '원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그것의 결핍에 관한 생각에 나의 주의를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들이 나에게 올 수 없었던 것이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며 성경말씀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되면서, 우주법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까지 해오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이야기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제 곧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과들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다른 결과들을 통해서 새로운 믿음과 지혜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 우주에 흩뿌려놓으신 충만한 잠재성과 가능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으니, 이제 그것들이 나의 경험 속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잘못되어가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중단함으로써, 그리고 이미 이루어져 있는 현실보다는 내가 바라 는 삶의 방향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시작함으로써, 나의 에너지가 커지고 그 에너지가 끌어당김의 자력(磁力)을 상승시키고 있으 니까 말이다.

이제부터 성경을 통해 다시 말을 배워, 내가 바라는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오로지 좋은 것들만 나에게 오고 있다고 선포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들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상상하며 미래의 기쁨을 지금(NOW) 누리며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이 그분의 모양과 형상대로 나를 창조하셨기에...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나에게 주시며 통치하라고 하셨기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모든 힘(POWER)과 능력(能力)이, 바로 지금(NOW) 내 안에 있기에...

이런 마음 챙김을 하고서, 다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이름을 등에 업고 16세기 동안 주도한 서양신학은 너무 많은 죄책, 너무 많은 내성(內省), 법과 죄와 은총에 대한 너무 강한 몰두와 집중으로 말미암아 우주와의 관계를 간과했다고 볼 수 있다. 동방교회 신학자 니콜라스 베르자예프의 의견에 따르자면, 아우구스티누스의 "내성적 양심"이 당대 이래 실제로 얼마나 서양 신앙인들의 성서 읽기 전체를 왜곡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비롯한 서양 전통에서는 하느님이 지나치게 내면화되고 우주와 단절시킨 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타락/속량 전통은 혼이 몸에 대해 내적 차원이라고, 즉 혼이 몸이라는 새장에 갇혀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성경 곳곳에, 온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할 때 행복에 이르고 풍요를 누린다고 기록되어 있건만, 원죄를 출발점으 로 삼고 죄와 속량에만 집중하게 될 때, 참다운 신뢰는 가르쳐지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도 자신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야기한다.

"하느님의 최초 · 최선 · 최대 행위는 당신 백성에게 역사의 순간을 믿고 맡기심이다. 하느님은 그들이 온 공동체를 위해 해야 할 것을 하도록 믿고 맡기신다." 라고 월터 브류그먼도 신뢰의 심리학에 관해 이야기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레니우스의 영성의 열쇠는 성장이다. 그에게 타락은 완전으로부터의 타락이 아니라 성장 의 좌절이다. 에덴동산 이야기에 대한 그의 견해에 따르면 아담과 하와는 어렸다. 우리는 그들을 넘어서서 발전해야 한다. 그는 우리의 "성숙"을 태아의 발육과 밀알의 영글기에 견주면서, 한 인격은 "하느님을 뵙고 알아 모시기 위해 성숙한다."고 밝힌다. 창조신학인 이레니우스의 신학은 타락 전의 아담에게 완전 상태를 귀속시키지 않고, 오히려 인간들이 죄와 용서에 의해서도 기쁨과 고통에 의해서도 자라게 할 수 있는 성장 잠재력에서 창조 완성을 본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느님의 작품일진대, 모든 것을 적절한 때에 창조하시는 여러분 작자의 손을 기다리시오. 여러분에 관한 적절한 때로 말하면, 하느님의 창조는 여전히 수행되고 있습니다." 이레니우스가 말하는 구원이란 인간의 "쇄신되는 성장"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성장은 신성으로서의 성장이다. "하느님의 씨가 우리 안에 있다. 바야흐로 배씨가 배나무로, 개암씨가 개암나무로 자란다. 하느님의 씨가 하느님으로 자란다."라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말한다.

이제 종교와 영성에서 타락/속량의 시대에 수반된 강제에 집중 되었던 우리의 시각을, "가시오. 그대 믿음이 그 대를 낫게 했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정시킬 때가 되었다.

노리치의 줄리안도, "흔히 우리는 신뢰가 모자란다. 우리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업신여기기 때문에 하느님이 우리에게 귀 기울이심을 확신하지 못한다. 빙엔의 힐데가르드도, "신뢰가 길을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하느님이 신뢰하시는 나'를 신뢰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바로 우리 약함의 원인이다."라고 말하자!

몇 년 전 처음 시작했던, 다른 계정의 내 블로그 글을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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