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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행 2:37-42, 사도행전 시리즈 설교(13)

by tat tvam asi 2024.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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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행 2:37-42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후, 열흘 동안을 전심으로 합력하여 기도하던 120명의 믿는 자들에게 성령께서 홀연히 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강력한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생겼고, 나가서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생겼으며,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의 말이 전 세계의 언어로 통역이 되어 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언어방언으로 하나님의 일을 전파했습니다.

 

물밀듯이 솟아나는 기쁨의 모습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미친 사람들이 아닌가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열흘 간 기도에 전념했던 120명의 문도들은 그런 기쁨이 넘쳤을 뿐만 아니라,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입에서 놀라운 진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그것도 세계 각지의 언어로 선포되니,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그들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갈릴리 시골 출신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행 2:11 /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또한 베드로의 입에서는 거의 핵폭탄과도 같은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지금 우리는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이미 오래 전 요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에게서 받아서 주신 것인데, 그 예수를 당신들이 죽였지만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진지한 고민에 빠진 사람들이 나오게 됩니다. 이들은 유대인들로,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오순절 날 예루살렘에 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첫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라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언제나 꿈쟁이들을 그 시대 가운데 세우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게 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어르신들은 꿈을 꾸리라 선포합니다.

 

행 2:17 /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유대인들은 처음 이 복음을 전할 때 반발하였지만성령을 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을 듣고 이제 들을 귀가 열려진 것입니다그리고는 그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행 2:37 /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언제 반응이 나타났습니까? "그들이 듣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청종하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언제 성장하지요? 입력이 있어야 출력도 있는 법입니다.

 

유대인들은 폭포수와 같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찌해야 합니까?"

이는 하나님 편에서 보면 매우 긍정적인 고백입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유대인들은 대부분 굳은 마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서 돌밭 같은 마음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의 설교에 마음이 찔렸습니다. 마치 가슴이 칼로 찔리는 것과 같이 아프고 괴롭게 됩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마음 상태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복음이 그 사람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단호하고 단백하고 단순했습니다.

 

행 2:38 /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하나는 '회개하라'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를 받으라'입니다. 먼저 베드로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삶을 돌이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신뢰하며 진정으로 크리스천이 되었다면, 그것에 따른 생각과 의지와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도 하고, 말로도 고백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런데 이전에 죄를 범했어도 사람이 피해자에게 가서 자기 자존심을 버리고 "잘못했습니다" 말하며 용서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정말로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있을 때 우리를 묶고 있던 과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게 됩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회개'는 원문에 '메타노이아'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의식의 변환' 곧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조만간에 따로 자세히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친 다음, "세례를 받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달리신 십자가 위에서 나도 함께 못 박히겠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죽고 새 사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작은 자아인 에고(ego)로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했던 과거를 십자가에서 청산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사람,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베풀 때 세례자가 세례 받는 사람의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경우도 있고, 세례 받는 사람의 몸을 물에 잠기게도 합니다. 즉 세례는, 물에 잠기면서 '나는 죽고', 물에서 나옴으로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세례를 받음으로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애벌레로 있던 나 자신이, 나비로 변화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인줄 알았던 내가 백조로 재탄생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6:4 /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기독교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생명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라"(마 16:25)고 하셨습니다. 

 

작은 목숨, '소문자 life',  '소문자 self'를 구하겠다고 안간힘을 하고 있는 이상 큰 목숨, '대문자 Life',  '대문자 Self'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목숨, 작은 자아를 내어놓을 때 비로소 큰 목숨, 큰 자아와 하나가 되어 그것을 찾게 됩니다. 작은 자아, 소아(小我)를 죽이고 대아(大我), 진아(眞我)로 부활하는 죽음과 부활의 역설적 진리를 체득하라는 것입니다.  내 안의 의식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나를 쫓아냄, 나를 여의는 체험, 이것이 전통적으로 말하는 '귀신 쫓아냄(exorcism, 逐鬼)'의 깊은 뜻이라고 사려됩니다.

 

우리의 이기적 자아(ego)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한국이 낳은 특별한 종교사상가 다석 류영모선생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몸나', '제나'에서 죽고 '얼나'로 '솟남'에 대한 것입니다.

 

다석학회 회장인 정양모신부에 의하면 인도가 석가를, 중국이 공자를, 그리스가 소크라테스를, 이탈리아가 단테를,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독일이 괴테를 낳았다면 그에 버금가는 인물로 우리에게는 다석 류영모 선생님이 있다고 헸습니다. 그분은 특히 삶을 '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잠을 자고 일어나고 깨어 활동하는 것을 죄다 놀이로 볼 수 있다... 하느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이 세상을 지나가면 말끔히 놀이가 될 수 있다"라거나 "우리는 묶고 묶이는 짐을 크고 넓은 '한데' 에다 다 실리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며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몸까지도 벗어버려야 한다... 다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빈탕한 데로 날아가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 갈 2:20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랜 세월동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죽음을 죄에 대한 대속 제물로만 이해하여 왔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이렇게 보는 방식은 매우 익숙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 비기독교인들은 십자가가 뜻하는 것이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
예수는 죄에 대한 희생제물이다.
예수는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
예수는 죄에 대한 변상(payment)이다.

 

이런 십자가 이해에서는,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 값을 치렀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십자가 이해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강력하게 옹호합니다. 또 다른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에 대해 마음이 불편합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피의 제물'을 요구했으며 예수가 그 제물이었다는 개념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런 십자가 이해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의미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십자가 이해는 천 년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1097년에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of Canterbury)가 쓴 신학 책에 이것이 처음 등장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책제목 자체가 그 책의 목적을 말해줍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 성육할 필요가 있었는가?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그 질문에 대답합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불순종 때문에,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다. 

2. 용서는 변상을 요구한다. 변상 없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는 것은 죄가 하나님께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불순종한 값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

3. 그러나 무한한 존재이신 하나님께 대해 우리가 진 빚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유한한 존재는 그 빚을 갚을 수 없다.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무한한 빚을 갚을 수 있다.

4. 그래서 예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그는 무한한 존재이며, 그의 죽음은 우리의 불순종에 대한 값을 치르기 위한 대속 제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다.

 

안셀무스 이후로 십자가에 대한 이런 이해가 '보통 기독교'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보통 기독교'란 말은 경멸하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대부분의 보통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난 천 년 동안과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 심지어 안셀무스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우리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생각해 왔습니다. 

 

문제는 안셀무스의 논증이 아닙니다. 그 논리는 나무랄 데 없습니다. 문제는 안셀무스의 만족설이 제1차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던 중에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논리는 성지 예루살렘을 무슬림에게 빼앗긴 기독교인 군주들과 하나님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군인들은 마땅히 전쟁터에 나가 마땅히 목숨을 바쳐햐 한다는 논리였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이런 십자가 이해가, 바울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복음의 핵심으로 만들 때 뜻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대속 제물은 바울에게 전혀 낯선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죄를 위한 대속 제물로 보는 것은 틀린 역사이며, 해로운 인간론입니다.

 

속죄라는 말에는 훨씬 폭넓은 신학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에서 보았던 속죄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속죄의 폭넓은 의미를 되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많은 일반적인 기독교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속죄라는 용어도 구원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속죄는 화해의 수단을 가리킵니다. 속죄는 분열이나 불화, 소외된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런 불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입니까? 어떻게 화해할 것입니까? 이것이 속죄의 문제입니다. 

 

속죄가 지닌 폭넓은 의미를 보여주는 것은 그 말을재구성하는 방식입니다. 즉 속죄(atonement)는 다시 '하나됨'(at-one-ment)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됨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수의 십자가는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합니까? 예수의 죽음이 어떻게 하나됨을 가져옵니까? 

 

위의 본문인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바울에게는,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길을 계시하셨습니다. 그것은 내적인 죽음과 부활, 곧 옛 정체성과 생활방식에 대해서 죽고, 새로운 정체성과 생활방식으로 부활하는 변화의 길을 뜻합니다.

 

이런 이해는 참여를 통한 하나됨(at-one-ment)을 강조합니다. 즉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참여하는 속죄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때문에 우리는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여하는 속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철저한 내면적인 변화의 과정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언어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것은 바울이 내면적인 십자가 처형, 내적인 죽음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예전의 바울은 죽었으며, 새로운 바울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아에서 살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의" 생명으로 가는 수단인데, 바울은 그이 편지들 속에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100번도 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의 동의어로서 사용한 "성령 안에서"라는 말은 15번 이상 사용하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정체성과 생활방식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변화는'정체성의 이식''(identity transplant)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의 옛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체성의 이식'을 흔히 '성령의 이식'(Spirit transplant)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커스 J.보그, 존 도미닉 크로산의 <첫 번째 바울의 복음>에서)

 

이 말을 하면서 염두에 두는 유비는 현대 의삭의 심장이식 수술인데, 이 수술을 통해 옛 심장이 새로운 심장으로 대체됩니다. 바울의 경우에는, 그의 영, 곧 옛 바울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게 되면, 이기적인 감정이라든지 편협한 생각들을 벗어나 참나, 얼나, 큰나라고 표현되는 새로운 나 또는 진정한 나를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걸 우리의 목표로 삼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과 분리된 것들이 온전함과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일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함으로 인해 신과 자신의 참된 본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관련해서 살펴볼 때, 한 가지 기억할 필요가 있는 점은, '내가 사후에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몰두해 현세에서 이웃과의 삶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여기에서 여러 가지 것들을 타인과 함께 나눔으로써 지상천국을 구현하려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고 현실에서 모두가 더불어 잘살 수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는 것은, 성령 체험을 통해 참된 본성을 체득하는 개인적인 사건이자, 동시에 타인과 더불어 살게 된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이것이 어떤 종교적 특심을 가진 특정 사람들에게만 주신 약속이 아니라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행 2:39-40 /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즉 복음을 받아들여 성령을 경험하는 이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과 땅 끝에 있는 모든 이방 족속, 곧 우리에게까지 주어진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당장 이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먼 데 사람", 즉 유대인이 아닌 모든 민족들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오는 어떤 사람이든, 하나님은 죄 사함과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는 약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자마다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행 2:41 /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결국 사도행전은 바로 성령을 선물로 받아 인생을 새롭게 가꾸어 나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은 성령을 받고 구원을 얻은 채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42 /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신앙은 어떤 명제에 대한 이론적인 동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대해 목숨 걸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활방식 전체를 헌신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헌신으로서의 신앙은 항상 상호적인 과정으로서, 양쪽 모두가 물론 각자 고유한 차별성과 특성을 갖지만, 양쪽 모두가 신실할 것을 가정하는 양자간의 계약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대해 신실하시며, 따라서 신앙적인 응답으로서 이 세상 역시 그분들에게 신실해야만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저와 여러분이, 신실한 그 자체가 되너  사당중앙교회 믿음의 주역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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