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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다반사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을 다녀오다..., 사색의 시간을 갖다...

by tat tvam asi 202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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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하고 복잡한 요즈음,

집 근처에서  하늘을 누리며 뻥 뚫린 공간을 누빌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몇 차례의 예배와 맡은 바 사역을 마무리하고 나면...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려고 준비를 한다... 

 

 

 

11월 첫 번째 주일을 보내며,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나뭇잎을 밟아본다... 

 

 

 

구름에 가리워져 보이지 않던 해가, 잠시 빼꼼히 얼굴을 내밀자...

 

하늘도 땅도 그 빛에 마음을 집중한다...

 

 

소중한 가족, 친구, 영원한 동반자, 아름다운 교회를 함께 섬기는 든든한 동역자...

 

 

그레나다에 있는 아들과 이곳에서 사역하는 세 식구 모두, 영적인 진보를 이루어가며 새롭게 눈을 떠가고 있다. 그동안 육신과 육신이 필요로 하는 물질적인 부분에 관심의 비중을 두고 있었다면, 이제는 육신과 물질은 이를 넘어선 무한한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진리에 몰입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사랑의 신성한 보석이자,

이 창조된 우주가 나오게 된 비밀의 근원이다.

지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슴에서 나온 이 빛을 우리들에게 맡겼다.

이 빛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다! 이를 더 큰 빛으로, 더 큰 영예로 확장시키리라!

우리의 생명은 '큰 가치를 지닌 진주'.

우리는 하나님의 풍요로움(wealth)을 지키는 창고지기와 같다.

우리는 '생명의 빛'을 받아왔음을 알고 있다.

나중에 이 생명을 어떻게 썼는지, 하나님께 설명해야 할 날이 오리라.

우리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알고,

우리의 창조력을 오직 축복하는 데에만 사용하도록 하리라.

생명의 기쁨 안에서 더 큰 즐거움을 맛보게 되리라.

우리의 운명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 - 그대의 존재 -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님께 답해야 하는 이도 바로 우리다.

바로 이것이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위대한 법칙이다.

우리가 생명의 완전성을 열망하기만 한다면

이를 통해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

우리 안에 내재한 그리스도의 빛은 영원히 궁극의 진실로 인도하는 문,

즉 하나님께 가는 길이다.

 

우리 마음과 가슴 안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하나님의 빛'이 있다.

멀리 남산이 보인다

 

 

인간이 겪는 모든 경험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인간이 자신의 근원을 인식할 수 있게 하려는 목적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배워야 하고,

자신의 소재가 '창조자 하나님의 영(靈)이라는 것을 배워야 하며,

인간 자신이 창조한 창조물들의 주인(Master)임을 배워야 하리라.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은 완전성과 권능이다.

내면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현존'이자 생명의 근원이며,

모든 선한 것과 완전한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인간이 자신의 근원을 모든 선한 것들이 한계 없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보고

그렇게 인식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우주의 모든 선한 것들이 그와 그의 세계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는 '근원에 집중된 그의 의식'이 그를 향해 모든 선한 것들을 열어주는

황금 열쇠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하나님의 현존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기로 한다.

우리의 생명이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

우리가 무언가를 할 수 있게끔 하는 모든 힘과 에너지가

하나님의 힘이자 에너지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세상에서 '신적 특성'을 가지고 성취를 이룰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현존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외적이고 인간적인 자아를 섬길 것인지를 선택하라는 명을 받았다.

 

 

 

지금 내가 터득해가고 있는 진리란 다음과 같다.

자신의 두뇌 중심과 가슴에 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감사해 하고,

그 현존을 받아들이고,

이 진리를 하루에도 여러 번 깊이 느껴보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무언가가 더 들어올 공간이 없을 정도로 가득하게

빛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은 한 인간의 생명과 일들의 대단히 조화로운 활동이다.

만일 어떤 이가 결의를 가지고 자신의 의식을 이 영원한 진리에 흔들림 없이 집중시킨다면,

그가 이루지 못할 성취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의식을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생명의 원칙과 근원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각자의 내면에 있는 신적 자아다.

개인적 자아는 마음이 어떤 외적 활동을 하고 있든 상관없이,

위대한 조화를 이룬 자아를 항상 의식적으로 인식해야 하고

그것과 지속적으로 내적 교감을 해야 한다.

이 위대한 신적 자아는 모든 인간의 몸에 매 순간 흐르고 있는 생명 에너지다.

 

인간은 이로써 물리적 형태의 세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 신적 자아는 마음에 흐르는 지혜, 모든 건설적인 활동들을 지시하는 의지, 모든 이를 지탱하는 힘과 용기이며 신성한 사랑의 느낌인데, 이 느낌이 인간에게 흐르게 되면 그는 모든 힘에 그 자신의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 그 어떤 선한 일도 모두 이룰 수 있게 하는 유일한 힘이 바로 이 신성한 사랑의 느낌이다. 신적 자아가 저항 또는 방해 없이 개인적인 자아를 통해 표출되었을 때는 그것이 모든 인간적 활동의 조건들을 뛰어넘는 무조건적인 승리, 의식적 권능이 된다.

 

 

 

표층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심층으로 가야 한다. 그리하여 시원함을 맛보아야 한다. 요즈음은 심층종교로 갈 준비가 된 사람이 가득하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는 심층종교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도마복음의 표현을 빌자면, '천 명 중에 한 명, 만 명 중에 두 명'에 불과했을지 모르나, 오늘날은 거의 모두가 글을 읽을 수 있고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새롭고 더 깊은 가르침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게 되어, 심층종교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이 엄청나게 나올 수 있다고 한다.

 

동서양 모든 종교에는 신비주의적 흐름이 있다. 동양 종교에서는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동일성(identity)을 강조하는 신비주의 전통이 활발했고, 서양 종교에서는 신비주의적 흐름이 종교사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기독교에서는 깨침을 강조하던 영지주의 전통이 초기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매도되어 탄압되는 바람에 신비주의 전통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한다. 그 뒤를 이은 서로마 기독교에서도 신비주의적 영성은 성공적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 위 디오니소스(Pseudo Dionysius)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동방정교회 전통에서 신비주의 전통은 보다 활발하게 살아 있었다.

 

종교의 가장 심층에는 신비주의 전통이 있는데, 그 층위의 두께는 종교마다 다 다르다고 한다. 우선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동양은 궁극적 실재와의 합일을 그 중심에 두고 있고, 서양은 합일보다는 신랑과 신부와 같은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주 정확한 것은 아닌 듯하다. 기독교 전통에서도 합일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좀 더 부연해 보자면 동양이 궁극적 실재와의 동일성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는 데 반해, 서양 종교사에서는 비록 신비적 합일 체험이 가능하지만, 신과 인간이 어떻게 다르고, 이 관계가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동서양의 종교 전통을 섣불리 구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동서양 종교사에서 '신비적 합일(mystical unity)'과 '신비적 동일성(mystical identity)'이라는 두 차원이 긴장 관계로 나타난 적이 많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나 친 일반화는 곤란하겠지만, 동양 전통은 신비주의적 동일성을 강조하는 흐름인 데 반해, 서양은 신비주의적 합일을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서양 종교 전통에서는 궁극적 실재인 신과 인간의 동일성을 곧바로 주장하는 것은 위험스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즉 신비주의자들이 자신의 체험에 기초해 신과 인간이 근원적으로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했다는 것이다. 반면 동양에서는 궁극적 실재와 인간의 근원적 동일성 주장이 통상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힌두이즘의 내가 곧 브라흐만이라는 선언이나 동학의 '인간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동일성의 주장이다.

 

 

나는 아빌라의 데레사 수녀의 신비적 합일에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데레사는 신비적 합일 이후 신비가들에게 어떤 상황이 전개되는지를 자신의 책 영혼의 성(Interior Castle)에서 논의하고 있는데, 그녀는 인간 영혼을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성으로 비유하고 인간 영혼이 일곱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신심이 깊어짐에 따라 우리는 보다 더 깊숙이 자리 잡은 방으로 옮아가는데 다섯 번째 방이 바로 신비적 합일(mystical union)을 통해 얻게 되는 신의 상태, 즉 신이 됨(deification)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다섯 번째 방은 인간은 죽고 신만이 존재하는 신의 상태인데, 데레사는 이 방에 대해서는 다른 방에 비해 짧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불완전한 인간이 신의 상태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인 것 같다고 한다.

 

한편 십자가의 성 요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자기 비움으로 유명하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모든 것이 무()이고 '나'라는 독립된 존재 역시 무()임을 깊이 깨달을 때 하나님이 전부임을 알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비어 있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채워질 것을 말하며, 이 세상에 있는 신비적 생활의 절정인 영적 혼인(靈的 婚姻)에 대해 언급한다. 영적 혼인 상태에서 "신랑은 당신의 놀라운 비밀을 영혼에게, 말하자면 그의 충실한 배우자에게 매우 쉽게 자주 계시하신다. 왜냐하면 진실하고 완전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떤 것을 숨기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긴 침묵 기도를 선호하거나 고독 속에서 여러 해를 보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거룩한 협력자 아빌라의 데레사는 이 점을 더욱 강조했다. 자신이 경험한 무아경(無我境)과 정신적 비상(飛翔)에도 불구하고 데레사는 예수님 모방과 이웃 사랑이 기도 중의 숭고한 체험보다 더 중요하다고 늘 주장했다.

 

어쨌든 다섯 번째 방을 통과한 인간의 영혼은 다시 여섯 번째 단계인 이른바 '영혼의 어두운 밤(the Dark Night of the Soul)'으로 돌아온다. 인간 영혼이 왜 신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이 지상 세계로 떨어질 수밖에 없냐고 탄식한다는 점에서 이 단계는 인간적인 고뇌와 혼란으로 가득하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아가서에서 문을 두드리던 연인이, 밖으로 사라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문을 두드리던 연인은 두 사람 모두가 동경한 완전한 합일에 들어가지 않았다. 왜 사랑하는 여인이 밖으로 나와 자기를 찾아 헤매게 했을까? 왜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런 고생을 시켰을까?

 

이에 대해서는 단 하나의 대답만 있을 법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밖으로 나오기를 원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안온한 집과 잠자리를 떠나 어두운 밤 속으로 그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는 그녀가 인색함과 걱정과 두려움이 함께하는 그녀의 생각과 행동과 감정의 습관을 떠나기를 원했다. 그는 그녀가 위안과 안전이라는 이기적 사랑이 함께하는 작은 자아(自我)의 집을 떠나 그가 숨기고 있던 신앙의 광대하고 신비스런 밤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그녀는 무아지경(無我地境), 즉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야 한다.

 

이 혼란의 상태를 거친 후에야 인간 영혼은 마침내 일곱 번째이자 여정의 마지막 단계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단계는 다섯 번째 맛보았던 신적인 기쁨의 상태를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현하는 인간 영혼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과정은 작은 자아에서는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 이 과정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신비 작업이다. 그것은 영혼으로 흘러드는 하나님의 유입이라고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모든 교파의 신비가(神祕家)들은 존재의 근원과 영혼의 중심과 진정한 자기와 공허와 텅 빈 충만(充滿)과 우주적 에너지에 관해 말한다.

 

뉴턴 물리학이 자연의 물리 법칙과 우주를 거시적으로 설명한다면, 양자 세상은 원자, 아원자(亞元子) 입자 같은 미시적인 것들의 근본적인 성질을 다룬다. 양자 법칙은 예측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 파동, 주파수, 정보, 의식, 그리고 빛의 스펙트럼의 세계를 다룬다. 양자 세계에서는 마음과 물질이 에너지에 의해 통합되어 있는, 아니 마음과 물질이 너무도 단단히 연결되어 있어 분리가 불가능한 주관성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에너지를 이용해서 신비적 현상을 설명하면 현대과학과의 대화가 가능하다고 본다. 아이슈타인(Albert Einstein) 이래, 물리학은 에너지와 광속에 몰두해 왔다.

E = mc2은 모든 물리학도에게 익숙한 공식이다. 물리학과 신학을 결합하려고 한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은 인간의 에너지를 빌려 사랑을 이야기했다. 또한 감정을 움직이는 에너지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왜냐 하면 모든 감정은 각각 다른 주파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사랑, 기쁨, 감사 같은 창조적이고 고양된 감정들의 주파수는 두려움, 분노 같은 스트레스 감정들보다 훨씬 높다. 다른 수준의 의도와 에너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의를 두는 곳에 에너지가 흐른다. 우리의 모든 창의적인 에너지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와서 우리의 주의 집중을 애타게 기다리는 외부 세계의 온갖 것들(ex : 아들&, 배우자, 건강상태, 동료, 은행계좌, 집안일, 직장, 휴대폰, 노트북 등)로 흘러 들어간다. 우리의 주의와 에너지가 대부분 외부의 물질 세상으로 향해 있다면, 생각과 느낌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내면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이 말 그대로 우리의 개인적 현실을 창조한다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데 에너지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주의[attention])과 다른 느낌(에너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느낌이 인생 모든 곳에 전자기적 신호를 보내며 영향을 주고 있다면, 우리는 습관을 따라 늘 똑같은 전자기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고, 따라서 항상 똑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삶의 창조자가 되려면, 과거와는 다른 생각과 느낌으로 내면세계의 균형을 잡고 우리 뇌를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신학은 하나님을 진화하는 우주 에너지의 원천이자 최고 에너지로 보게 되지 않을까?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주의를 집중했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그 미지(未知)의 것을 우주 에너지를 통해 내게 흘려보내셨을 때, 한 번도 실망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우리는 전자가 그 전자구름 속의 어디에서 나타날지 절대 알 수 없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떤 것이 나온다. 양자역학이 흥미진진하고 예측 불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전자가 늘 물질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에너지로 혹은 파동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전자는 관찰자의 관찰 행위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관찰자(마음)가 와서 전자를 찾으려 들면, 그 관찰 행위(유도된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모든 에너지를 전자(물질)로 붕괴시킨다. 따라서 전자가 무한한 가능성(미지)의 세상에서 기지(旣知)의 세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시공간 속에서 하나의 전자로서 국소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관찰자가 사라지면 전자는 다시 가능성의 상태로 돌아간다. 다른 말로 에너지로, 미지의 세계로, 자신만의 용무(agenda)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에너지와 가능성으로 돌아갈 때 전자는 비국소적 성질을 갖게 된다. 양자역학에서는 마음과 물질을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뉴턴 물리학이 예측 가능한 세상에 대한 것이라면, 양자역학은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 관한 것이다.

 

눈을 감고 명상을 하면서 무한한 공간으로 초점을 열 때 우리가 하는 일이 이것이 아닐까?! 우리는 물질이 아니라 에너지, 공간, 정보, 가능성에 더 많이 주의를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 영역보다 비물질 영역을 더 알아차리게 된다.

 

명상할 때 나는 예측 가능한 기지의 것에서 에너지와 주의를 거둬들이고,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것에 에너지를 쏟으려 한다.

 

에너지를 기초로 신비체험을 설명하면 기독교는 아시아와 더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너지는 생명 에너지, 생명력, 곧 기()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중국 의학에서는 에너지의 불균형으로 병이 생긴다고 보고, 몸의 에너지 균형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에너지의 흐름은 다도(茶道)와 무술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무엇보다 에너지의 흐름이 명상의 핵심이다.

 

내면의 감정적 중독(ex : 죄책감, 괴로움, 두려움, 좌절, 불안, 원망, 무가치감 등)에서 벗어날 때, 우리 몸도 우리를 과거에 묶어두던 습관과 감정들의 사슬에서 벗어나, 그것들에 묶여 있던 에너지도 풀려나게 된다. 묶여 있던 감정의 에너지가 모두 풀려나면 우리 몸은 이제 더 이상 우리 마음이 아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반대가 용기임을, 부적함의 반대가 온전함임을 발견하고, 의심 너머에 앎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지의 세상으로 발을 들이고 분노나 미움을 내려놓을 때 사랑과 자비를 발견하게 된다. 그 에너지는 사실 서로 다르지 않다. 전에는 그 에너지가 몸속에 갇혀 있었고, 지금은 풀려나서 새로운 운명을 설계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나는 이것을 위해 명상을 시작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같은 심리학자는 오늘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우주 공간(outer space)을 탐색하는 것이라기보다 내 속의 내면 공간(inner space)을 탐색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있다라는 말은 곧 명상의 중요성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다.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있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고 거기서 그 나라를 찾아야 할 것이다. 퀘이커 교도들은 한 시간 내내 명상하면서 내면의 빛(inner light)을 기다리다가 그 때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서로 나눈다. 이건 명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21세기 영성 혹은 심층종교는 기도와 명상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환갑이 다 되도록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껴온 탓에 몸이 곧 마음(mind)이 되어 버렸지만, 이제는 생존 모드가 아닌 창조 모드로 나의 에너지를 배분하여, 내 존재의 목적대로 부르심을 받은 소명대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깨닫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닦아야 하고, 인간에게는 그 닦음이라는 것이 무한에 가까운 일임을 안다.

 

아울러, 거의 모든 심층종교들이 그들의 종교적 삶의 마지막 단계로 이웃을 위한 봉사를 강조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된 후에는, 자기가 잘나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팔과 다리가 언뜻 보면 서로 떨어진 다른 것들로 보이지만, 큰 차원에서는 한 몸이고 서로 도움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는 원리에 입각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가장 못한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께 베푸는 일'( 25:40)이라는 말씀 역시 이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진실은 모든 게 '하나'라는 것이다. 상호 연관, 상호 의존성이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인간의 도덕적 행위는 인위적으로 '하여야 한다'는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심층 차원의 인식이 가능해질 때 저절로 나타나는 자연스런 행동인 셈이다. 결국 도덕의 완성은 종교적인 완성이 있은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다. 심층으로 가는 과정에서 타인을 사랑하고, 자비롭게 대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가장 중요하게 강조되는 것은 아무리 이야기하여도 모자랄 것이다.

 

심층은 단지 신비적인 합일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내면적인 종교성이나 깨달음이 각각의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Sydney Spencer가 쓴 세계 종교에서의 신비주의를 보면, 도교에서의 신비주의, 기독교의 신비주의, 불교의 신비주의 등을 소개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무아(無我)와 자유스러움에 대한 강조라든지, 하나 됨의 체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것 등 서로 통하는 것이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라든지, 네 이웃을 존중하라는 윤리적 측면도 빠지지 않고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신비주의 전통이 설파하는 궁극적 실재 혹은 신에 대한 내용 역시 너무도 흡사한 점이 많다.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신학을 살펴보면, 그들은 신을 전체로서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은 저 하늘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있다는 것이다. 특정하게 한계 지어진 어떤 존재로서 신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신을 얘기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이다. 그에 따르면 신은 존재의 근거라 했다. 이런 이야기를 현대 신학자 중에서 가장 잘 수용한 사람이 폴 틸리히(Paul Tillich)이다. 그는 신을 '존재의 바탕(ground of being)'이라고 했다.

 

이제 나는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신나는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기독교를 신나는 종교로 되살리고 싶다. 자기의 수행이 나날이 깊어져 더 깊은 차원의 실재를 발견하는 기쁨을 나 자신부터 온전히 누리고, '하늘가는 길의 동반자', 한 몸의 '다른 지체'라고 할 수 있는 벗들도 누리게 하고 싶다.

 

기독교가 너무 심각해진 것은 아닐까! 기쁘고 행복하기 위해 믿음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죄와 벌을 피하기 위해 지나치게 강박적으로 노력한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깨달음도 신 체험도 마찬가지다. 즐겁고 기쁘게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오도록 만드는 게 아니라, 너무 심하게 매달리는 것은 일종의 강박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강박적 행위 속에는 참된 기쁨과 평안, 즐거움보다는 잘못된 감정과 그릇된 자만심이나 우월감이 자리하기 십상일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 존재의 근원이시고 궁극적 실재이신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에, '웃음'이 넘쳐나도록 할 것이다.

 

나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만 해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냈다그 의미는 구체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나 자신을 넘어 다른 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내는 삶을 통해 내 존재의 목적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분별은 가슴으로 한다는 생각을 품고 사람 안의 마음, 감정, 가슴에 민감한 영적 감수성, 그리고 갈망을 훈련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도 있는 인간 이해와 영혼을 돌보는 일을 위한 학문을 연구하고 그 분야에서의 실제적인 훈련을 함께 할 것이다. 사람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행복의 느낌들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향상시킬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 더 나아가 이를 지속 가능하도록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갈 것이다.

 

그리고 강철 같은 기도와 순수한 믿음, 자기 초월의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기대를 회복할 것이다. 또한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범할 수 있는 우() - 과거 집착 -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올바로 예측할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 공동체 멤버들 각자의 역량  현실적 능력, 달란트, 잠재적 가능성 을 철저히 분석하게 할 것이다. 그것에서 출발하여 분별이 가능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자로 서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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