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한 월요일 아침을 열었다. 원로장로님 임원회의가 교회에서 있어서다.
사랑하는 우리 ♠♡장로님이 원로장로 회장직을 맡고 계셔서, 모든 회의와 간식과 식사를 준비하셔야 한다고 했다. 그중에서 간식은 내가 준비해 드리고 싶었다. 식사는 이미 갈비탕을 사서 드시기로 결정을 해놓으셨단다.
주일인 어제, 모든 예배와 몇몇 일정을 마치고 곧바로 재래시장으로 달려 갔다. 홈플러스와 이마트는 짝수 주 일요일에는 모두 휴점이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에 도착한 때가 꽤 늦은 시간이어서 곳곳에서 문을 닫으려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급한 마음이 있었으나 원로장로님들을 대접하고픈 마음이 하늘에 닿았을 터라, 어르신들에게 적합한 간식을 꼭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마침내 어르신들이 좋아하실 만한 간식을 발견했다.
구운 서리태콩과 땅콩, 캐슈넛, 셈베과자와 돼지감자를 튀겨 만든 과자...
집에 구비해 놓은 고구마와 단감을 썰어서 귤과 함께 곁들이면 되겠네...
건강에 좋은 무가당 두유와 원두커피를 끓여 내놓으면 좋아하실 것 같다...
장로님께서 홍삼캔디와 다쿠아즈를 가져다 주셔서, 한 두 개씩 놓아드렸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추워진다니, 현충원을 걷기로 했다.
60평생, 이렇게 은행잎이 많이 쌓인 것은 처음 본다...
차를 타고 가다가 너무도 경이로워, 세 식구가 약속한 듯 차에서 내렸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은행잎이 비처럼 내렸다. 장관이었다.
오늘 지나면 이 은행잎도 다 떨어지겠다 싶었다...
세월의 흐름이 이렇게 빠르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는 시간...
나는 요즘 종종 '내 밖에 선다'라는 의미의 '엑스터시(ecstasy)'를 경험한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종교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이다.
비(非)일상적인 의식 상태인 엑스터시로 들어가는 능력을 여러 책들을 보며 깊이 연구하고, 기도하며 키워나가고 있는 중이다. 서울대 비교종교학과 성해영교수의 저서,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를 읽으며, 수십 년동안 의문을 가졌던 이원성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
엑스터시는 나를 벗어나는 '초월'의 가능성을 뜻한다고 한다.
나는 기독교 목회자의 아내로, 또 물리학과 신학을 전공한 목사로, 물질적 세계 외에 보이지 않는 차원이 있다고 확신한다. 심지어 그 차원이 이 세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엑스터시는 익숙한 일상의 세계에 틈을 만들고, 내가 여태껏 몰랐던 차원을 드러낸다.
이럴 때 나는 일상의 '나'를 벗어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엑스터시는 나를 포함해 존재 전체의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 같다. 새로운 측면을 인식하여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것이리라...
나는 내 종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나 아닌 것', '옳음'과 '그름'과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 내가 모르는 '그 무엇'이 드러나도록 허락할 때 엑스터시는 가능해질 것이다.
나는 오랜 시간, 이분법적 사고의 근원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다가, 서울대 비교종교학과 성해영교수의 저서,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를 읽다가 비로소 그 답을 얻은 것이다.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성해영교수의 저서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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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2장 16-17절을 보면, 선악과 이야기가 나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이 대목에서 궁금증이 생긴다. '따 먹으면 안 되는 나무를 왜?'라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뱀의 유혹에 넘어간 하와가 아담을 부추겨 함께 열매를 먹는다. 먹은 다음에는 부끄러움에 사로잡혀 각자의 성기를 가린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지는 열매를 먹었는데, 뜻밖에 성적인 수치를 알게 된 것이다. 이 역시 수수께끼처럼 들린다.
인간의 성(性) 역시 신이 창조한 것인데도 부끄럽게 여기니 말이다. 선악이라는 관점에서는 성이 곧 악으로까지 보인다.
선악과를 먹었는데 성을 인식한 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사건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기독교는 이를 신의 뜻에 불복한 최초의 행위인 '원죄(原罪, original sin)'라 부른다.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낙원에서 추방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일부 신비주의자들은 보다 상징적인 해석을 제안한다. 이면에 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선악과가 성적 차이는 물론 '이원성' 자체를 알려준 사건으로 해석한다. 성을 뜻하는 영어 단어 'sex'는 분리를 뜻하는 라틴어 'sexus'에서 유래했다. 남녀의 성은 이원적 나뉨의 가장 뚜렷한 표식이다. 두 사람은 열매를 먹은 후 성적 차이를 처음으로 인식한 사춘기 청소년과 유사한 태도를 보여준다. 성기를 가린 행위는 인간의 성이 부끄럽거나 악한 것이라기보다는 이원적 분리를 인식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선악과는 성을 필두로 한 인간 삶의 많은 이원성을 상징한다. 이후 전개된 상황이 이 사실을 드러낸다. 낙원에서의 추방은 신과 인간의 분리를 뜻한다. 쫓겨난 아담은 노동을 해야 한다. 과거에는 자연이 인간을 보살폈지만, 이제는 힘겨운 노동이 필요하다. 자연과 인간의 분리이다.
하와의 출산은 부모와 자녀, 삶과 죽음이 니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은 후손을 낳아 인류를 존속시킨다. 선악과를 먹는 결과가 죽음이라고 하나님이 미리 경고했다는 것은 인간이 원래 불멸의 존재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니 생명의 나무는 애초부터 조심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처럼 선악과는 모든 이원적 분리의 상징이라는 해석이다. 선은 악으로 인해 성립된다. 악이 없으면 선을 선이라 말할 수 없다. 신/인간, 천상의 세계/물질적 세계, 남/여, 자연/인간, 부모/자식, 삶/죽음과 같은 이원적인 쌍들 역시 동일하다.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정반대로 보이는 대립적인 쌍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또 다른 궁금증도 자아낸다. 죄는 금지된 행동을 했을 때 성립한다. 그런데 신은 전지전능(全知全能)하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한 존재이다. 모든 것을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다면 신의 이런 분질에도 불구하고, 선악과의 사건이 가능할까? 신은 지혜의 나무는 물론이거나와 유혹의 주범인 뱀마저 만들었다. 사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은 이 사건을 막을 수 없었을까, 아니면 막지 않았을까? 신의 본질에 비추어보면, 막지 못하는 사건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럼 더 깊은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불복의 결과로 모든 것을 잃은 두 사람은 생명의 나무 열매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신이 불 칼을 두어 나무를 지키게 했으므로,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라는 작품에서 두 남녀가 나무 아래에서 꼭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무슨 의미일까? 그림은 모든 이원적 분리가 '결합(union)으로 해소되는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원성의 첫 인식이 남녀가 성기를 가리는 사건으로 표현되었다면, 남녀의 포옹은 태초의 일원성이 회복되는 순간을 상장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보면 포옹은 남녀의 육체적 결합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이원성의 소거이자, 궁극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재결합이라 본다. 에덴동산에서 경험했던 시원적 상태로의 회복이다.
신과 인간의 하나됨은 신비주의 전통이 강조하는 엑스터시를 통해 도달된다. 재결합을 통해 분리가 해소될 때, 태초의 영생이 되찾아진다는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출발해 선과 악에 이르는 모든 이원적 분리가 없어질 때, 태초의 온전함과 함께 영생이 획득된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성(性)이란 본래 나눔을 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묘하게도 분리를 없애는 결합의 뜻도 지니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상징으로 가득하다. 선악과 사건도 액면 그대로가 아니라 유연하게 해석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신의 허락 없이, 인간이 신의 뜻을 어기는 일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니 태초의 불복종이 인류의 원죄라는 것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할 듯싶다.
분리가 없었다면, 그토록 갈구하는 재결합과 영생도 불가능해지니까 말이다. 즉 분리와 재결합의 드라마 자체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성해영교수는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라는 비유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했다. 곁을 한 번도 떠나지 않고 그저 순종했던 아들이 아닌, 온갖 나쁜 일을 저지르로 돌아온 아들을 더 반겨주는 아버지 이미지를 나타낸다. 아버지를 잊은 채 방탕하게 살았던 아들은 집에 돌아온 후에야 비로소 부친의 큰 사랑을 실감한다. 처음부터 말을 잘 들었던 아들이나 주변인들은, 돌아온 아들을 극진하게 받아주는 아버지를 선뜻 이애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아버니의 사랑을 강조하는 설정일 수 있으나, 부친의 사랑을 저버리고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망각하는 행위는 그저 악이 아니라, 그 가치와 의미를 진심으로 알게 만드는 장치가 아닐까...
실제로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모든 종교가 전하는 분리와 재결합이라는 영원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이 존재의 원천에서 분리되었다가, 간난신고 끝에 재결합함으로써 자신의 참된 정체성과 태초의 행복을 다시 확인한다는 신화 말이다. 망각과 이로 인한 불복종에도 불구하고, '탕자'의 정체성이 아닌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참된 정체성을 다시 기억한다는 주제 말이다.
인식의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차원과 현실 세계가 통합된 이후에야, 성스러움과 일상적 삶의 조화가 모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삶과 일상적 삶의 유기적인 통합이 가능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종교의 심층적 진리는 으레 역설의 형태를 띤다.
무엇보다 엑스터시라는 사건 자체가 역설이다. 내가 내 밖에 설 때, 나는 '과거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변모한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내 속에 더 온전한 나의 정체성이 이미 내재한다면 실상은 반대이다. 실제로는 내가 내 밖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인식되지 않았던 미래의 내가 드러난 것이라 볼 수 있다. 청소년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잠재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동시에 내 밖을 지향하는 엑스터시(ecstasy)는 내면으로 향하는 '엔스터시(enstasy)'에 다름 아니라는 역설도 보여 준다.
'내 안에 서다'라는 의미의 엔스터시는 엑스터시의 반대로 보이지만, 실상은 역설적인 전체를 이룬다. 우리는 내 밖에 서기 위해 오히려 내면으로 깊숙하게 들어가야 한다.
명상과 같은 내부로의 침잠이 뜻밖에도 '나'를 멋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내면을 향한 움직임이 안과 밖을 넘어선 초월의 차원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얘기다. 이렇게 볼 때 '안'과 '밖'은 반대가 아닌 통합된 전체를 구성하는 분리 불가능한 두 측면이다.
엑스터시를 목표로 삼는 명상 수행 역시 역설 위에 자리한다. 명상은 '나 자신'을 비우려는 '나'의 치열한 시도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를 없애려는 '나'의 역설적인 노력이니까 말이다. 나를 비우는 데 성공하면 지금까지 몰랐던 내가 사롭게 드러난다. 직관적인 통찰의 순간에 나는 여태껏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식한다. 그 앎 역시 역설이다. '앎'이 '모름'을 전제로 하면서도 동정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쌍을 이루니까 말이다. '무지의 인식'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지혜처럼 앎과 모름이 기묘하게 어우러진다.
나아가 나를 비우는 노력은 '삶과 죽음'의 대립 쌍 위에 자리한다. 명상을 통해 과거의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인식되기 때문이다. 죽음과 재탄생이다. 예수는 이를 '밀알'에 비유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요한복음 12장 24-25절)."
이처럼 과거의 내가 죽을 때 비로소 나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그러니 죽음은 삶을 낳은 불가결한 사건이다. 동일한 원리로 재결합을 위해서는 분리가, 온전한 앎을 위해서는 망각과 무지가 꼭 필요하다. 역설을 대립 쌍의 한쪽만을 추구해서는 진정한 성장과 발달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용기는 두려움을 아예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것이다. '두려움'이라는 반대의 측면을 포용하지 않을 때, 용기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다. 자기가 틀리거나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진정한 앎이 가능하다. 무지와 오류 가능성을 허락하지 않는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다. 만용과 독선은 '단호함'과 '확신'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려움'과 '무지'의 몸짓이다.
모든 종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이 여전히 있다고 끊임없이 역설한다. 나의 무지를 인식하고, 앎의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둘 때 그 미지의 차원이 드러난다. 그때 나는 내 밖에 서는 엑스터시를 비로소 경험한다. 이 사건을 위해서는 미지의 것이 드러나도록 허락해야 한다. 또한 엑스터시는 지금껏 몰랐던 확장된 정체성은 물론 거기에 수반되는 경이로움도 알려준다.
심층 종교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양쪽 모두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려 시도한다. 역설의 적극적인 수용이다. 안과 밖, 앎과 모름, 삶과 죽음은 통합된 전체를 이루는 분리할 수 없는 양면이다. 역설을 이런 방식으로 우리 삶의 모든 차원을 관통하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역설은 곧 전체성의 인식이다.
성숙에는 시간, 노력, 인내, 겸손, 용기 등 참으로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귀하다.
종교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으려면 과거의 종교는 죽어야 한다. 죽음이라고 표현되듯이 과거로부터의 철저한 탈피가 필요한 것이다. 애벌레가 고치를 벗어 던진 후에야 아름다운나비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럴 대 종교는 참으로 큰 기쁨과 행복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