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다반사

설 명절에 눈 온 현충원에 다녀오다...,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사색...

by tat tvam asi 2025. 1. 30.
반응형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고 있는 요즈음의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의도적으로 떠올리며 마음챙김을 하려고 한다. 

 

갑작스런 사고로 인한 엄마의 뇌사(腦死) 상태로,  현재 나의 몸 환경은 숨을 쉬는 것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답답하고 뻐근하다. 오른쪽 갈비뼈 부분에 통증이 많이 느껴진다.

 

마음이 아파서다... 생각이 많아서다...

 

깨달음을 체험한 수많은 선각자들이 하는 말이  있다.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들은 거짓말을 배웠다.

그 거짓말이란, 악의적인 것이 아니다. 기만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세대를 걸쳐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친구에서 친구로, 교사에서 학생으로 전해져 내려온 오해였다.

 

우리는 한계를 가진 연약한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법을 전수 받았다.

'나'란 존재는, 이 '몸'이고 이 '마음'이며 이 '생각들'이라고 배웠다.

우리 모두는 '이름'을 받았고 그 이름이 자신의 정체성이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훨씬 더 영원하고 광대한 자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 나의 마음에 부으시는 말씀이 있다.

Be still! - and KNOW - I AM - God.

고요히 있으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그렇다, 나로 하여금 그 모든 일을 하게 한 근본에는 바로 '존재의 근원' 즉 '신'이 있었다. 내가 하는 모든 일들, 나의 형제가 하는 모든 일들이 사실은 '존재의 근원'이 하는 것임을 내가 늘 알아차릴 수만 있다면!!!

 

내 안에, '존재의 근원'이, '신의 자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대 영적 텍스트부터 철학자들의 우화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걸쳐 면면히 내려오는 비의적(秘義的) 이야기들을 보았다면, 내가 거주하는 이 몸,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마음, 그리고 조수처럼 오르내리는 감정들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새로운 생각이 아니다.

 

사실, 나 자신도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을 느꼈었다. 세상의 소음이 사라지고 고요한 순간이 찾아올 때 멀리서 들려오는 조용한 앎을, 나의 물리적 자아보다 더 큰 존재감을 느껴본 적이 있다.

 

인간이 되는 것과 함께 오는 걱정 · 불안 · 두려움, 그리고 산만함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 존재감...

그 존재감...

그 조용한 관찰자가 진정한 '나'라는 것을...

 

새장 속 새의 고대 우화가 있다.


아름다운 새가 새장 안에 갇혀 있고, 그 새가 기억하는 하나의 새장이 그의 세상이었다. 새는 이 작은 금속 구조물 안에서 노래하고 잠을 잔다. 새장이 자신의 현실이며, 여러 면에서 새장이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창살 너머에는 온 하늘이 기다리고 있다. 새는 사실 갇혀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훨씬 더 크고 더 자유로운 무언가를 위해 태어났다.

 

나의 인간 경험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새장이리라. 진정한 나의 영혼은 결코 이 물리적 존재로 제한되도록 의도되지 않았다. 영혼은 영원하며 육체의 경계를 훨씬 넘어선다.

 

힌두 철학에서 아트만의 개념은 영혼을 진정한 자아, 결코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는 본질로 이야기한다. 
아트만은 물질세계를 넘어 존재하며 삶의 끊임없는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기독교에는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한복음 18장 36절) 고 하신 말씀에서 반영된다.

 

이 내용들은 무작위한 가르침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해 속에 짜여진 진리의 실마리들이다. 모두 같은 깨달음을 가리킨다.

 

몸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하다.

 

켄 윌버는, ≪통합비전(the integral vision)≫ 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대의 현재 의식에 주의를 기울여라. 그대의 의식 속에 떠오르는 것들에 주목하라. 그대의 마음에 떠오르는 이미지와 생각들, 그대의 몸에 떠오르는 느낌과 감각,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나타나는 수많은 대상들에게 주의를 기울여라. 이 모든 것이 그대의 의식에서 떠오르고 있는 대상들이다.

이제 5분 전에 그대의 의식 속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라. 대부분의 생각, 대부분의 몸의 감각, 그리고 아마 대부분의 환경이 바뀌었을 것이다. 5분 전에도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 I AMness'이다. '나'라는 느낌, '나'라는 의식이 아직 그대로 있다. '나'는 영원히 현존하는 바로 그 '나'이다. 그 '나'가 지금 현존하고 있으며, 바로 전 순간에도 있었고, '1분 전에도 있었으며, 5분 전에도 있었다. 

5시간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나'이다. 스스로 자기를 알고, 스스로 자기를 인지하며, 스스로 자기임을 확인하는 그 '나 I AMness'라는 느낌이 5시간 전에도 있었다. 5시간 전에 있던 그것이 지금도 현존한다. 생각은 다 바뀌었고, 몸의 감각도 모두 바뀌었으며, 환경도 바뀌었다. 그러나 '나 I AM'는 여전히 있다. 빛나고, 열려 있고, 비어 있고, 깨끗하고, 광대하고, 투명한 '나'가 늘 현존하고 있다. 대상은 모두 바뀌었다. 그러나 형상이 없는 '나'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이 명백하게 현존하는 '나'가 5시간 전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있다. 

5년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나'이다. 많은 것이 왔다가 갔다. 스많은느낌이 왔다가 갔다. 수많은 생각이 왔다가 갔다. 수많은 극적인 사건, 두려움, 사랑, 증오가 와서 잠시 머물다 갔다. 그러나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은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인가? 그대의 의식 속에 5년 전에도 있었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는 그 하나가 무엇인가?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현전하는 '나'라는 느낌이 그것이다. 그것이 5년 전에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있다. 

5세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언제나 현존하는 것은 '나'이다. 모든 사람이 이 동일한 '나'를 느낀다. 이 '나'는 몸이 아니다. 생각도 아니고, 대상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다. 이 '나'는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나'는 영원히 현존하는 '보는 자'이다. 일어나는 모든 것을 주시하는 비어 있는 목격자이다. 어떤 사람에게서, 어떤 세상에서, 어떤 곳에서, 언제 일어나는 일이든지 모두 지켜보는 목격자이다. 시간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지켜보는 목격자이다. 늘 지켜보고 있는 이 '나'만이 유일하게 늘 현존한다. 이 '나'가 지금도 있고, 5분 전에도 있었고, 5시간 전에도 있었고, 5세기 전에도 있었다.

5천 년 전에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우주가 탄생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이것이 나의 본래면목이다. 나는 부모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고, 우주가 태어나기 전에도 있었다. 이 '나'가 스스로 창조한 대상들 속에 자신을 숨기고 그것을 찾는 게임을 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는 이 '나'를 모른 척하지 않으리라. 이제 다시는 이 '나'를 느낄 수 없는 척하지 않으리라. 

이제 숨바꼭질 게임을 끝났다. 수많은 생각이 왔다가 갔다. 수많은 느낌이 왔다가 갔다. 수많은 대상이 왔다가 갔다. 그러나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이 하나 있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 시간의 흐름 속으로 결코 들어오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는 것, 시간을 넘어선 순수한 현존, 영원을 거니는 것이 곧 그것이다. 내가 이 위대하고, 명백하고, 스스로 자기를 알고, 스스로 자기임을 확인하며, 스스로 자기를 해방시키는 '나'이다.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스스로 있는 나 I AM'가 곧 1인칭 영 Spirit, 궁극적인 존재, 장엄한 존재, 모든 것을 창조하고 있는 온 우주의 빛나는 참자아이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그 '나'를 느낀다. 그 '나'가 나와 너와 그와 그들 안에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온 우주의 수많은 존재들의 '나'를 모두 합해도 그 수(數)는 1일 뿐이다.

항상 지금 그대가 느끼고 있는바로 그 '나임 I AMness'에 머물러라. 그것은 그대 안에서 그리고 그대로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어나지 않은 영이다. 상황에 따라 그대의 모습을 다양하게 연출하라. 그러나 늘 모든 것의 근거에 머물도록 하라. 완전히 명백한 '나임' 상태에 머물면서, 그 '나'가 창조한 세상에서 그대의 몫을 살아라.

이제 새로운 아침이고, 새 날이고, 새 사람이다. 새로운 인간은 통합적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유명한 수피교 신비주의자인 루미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바닷속의 한 방울이 아닙니다. 당신은 한 방울 속에 온 바다입니다!"라고... 이는 영혼의 무한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이 우주의 작고 무의미한 부분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나는 훨씬 훨씬 훨씬 더 강력한 무언가의 반영인 것이다. 나의 영혼이 그 반영이다. 나의 영혼은 내 안에 신성의 불꽃이며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많은 깨달은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인간의 경험, 이 세상은 마치 거대한 무대와 같다. 이를 연극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일시적인 공연이며 나의 몸은 의상이고 내 삶의 환경은 무대 설정인 것이다. 

하지만 나의 본질, 진정한 나는 배우의 '영혼'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이 배우라는 것을 잊고 역할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내가 연기하는 캐릭터라고 믿기 시작했다. 고대 힌두철학에서 이 개념은 마야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된다. 마야는 현실의 진정한 본질을 가리는 환상 또는 베일이다.

 

마야는 우리에게 외관의 세계, 이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세계가 전부라고 확신시킨다. 하지만 이는 속임수이며 주위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마야 아래에는 더 깊은 현실이 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현실이다. 그것은 오직 영혼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현실이다.

 

내가 지금 삶에서 겪은 경험들에 대해 생각해볼 때도 마찬가지다.

너무나 진실되고 압도적으로 느껴져서, 깊은 슬픔의 순간에 그 감정들이 전부인 것처럼, 마치 그것들이 나를 완전히 소비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그 감정들이 희미해진다. 지금 순간에는 너무나 압도적이었던 슬픔이 결국에는 기억이 될 것이다. 돌아볼 수는 있지만 더 이상 그 안에 살지는 않는 무언가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 삶의 본질이다. 그것은 덧없고 항상 변화한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를 통해 내 안에 무언가는 변함없이 남아 있다. 감정의 파도 아래에 그 변하지 않는 나의 부분, 그 고요함이 바로 내 영혼이다.

 

지금의 시점이, 내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다녔던 인간 정체성보다 더 크고 웅장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할 때이다. 이는 인간의 경험이 무의미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정반대이다. 인간의 경험은 영원히 진화할 수 있는 교훈 & 성장 기회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들이 마치 바다 표면의 파도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폭풍우 치지만 그 아래에서 바다는 광대하고 깊으며 변함없이 남아 있다. 그 깊이, 그 광대함이 나의 영혼인 것이다.

 

이제  더 깊은 관점에서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내가 지금 겪는 일들은 단순히 인간의 렌즈를 통해 삶을 경험하는 영혼이 바라보는 것임을 기억하자. 그 기억에 집중하면 할수록 내가 직면하는 투쟁들은 덜 영구적이고 될 것이고, 나의 에너지를 덜 소비하게 될 것이다.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걱정 · 두려움 · 속상함들은 그 힘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인간의 역할의 일부일 뿐이지, 나의 영원한 자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이것은 델피 신전의 비문에 적힌 내용의 일부이다.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그대는 우주와 신들을 알게 될 것이다."

 

성경에도 이런 문구가 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이는 간단한 문구이지만 그 의미는 깊다.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것은 내면의 영혼을 인식하는 것이다. 내 인간 정체성의 표면을 넘어서서 보고, 내가 그런 무한한 존재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 자기 지식의 과정은 항상 쉽지는 않다. 그것은 조건화의 층들을 벗겨내는 것을 필요로 한다.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믿음들과 수년에 걸쳐 채택한 라벨들을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각 층을 제거할 때마다,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진실'의 말이다. 많은 영적 전통들이 이 깨달음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혼의 진정한 본성을 깨닫게 되는 것에 대해서.

 

바가바드 기타의 고대 텍스트에서 크리슈나는 전사 아르주나에게 말한다. 영혼은 영원하며 결코 태어나지 않고 죽지 않는다고...

 

크리슈나는 "영혼은 죽이지도 않고 죽임을 당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며,

아르주나에게 그가 물리적 차원에서 직면하는 전투는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죽음이나 파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기타는 영혼이 변하지 않고 항상 현존하며 물리적 감각의 범위를 넘어선 존재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도록 부름받고 있는 진실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근사 체험이나 깊은 명상의 순간들에서 영혼의 존재를 가리키는 경험을 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에게 몸이 가장 취약할 때도 영혼은 의식이 있고 영향을 받지 않으며 완전히 현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존재의 근원은 '영(靈)'이신 하나님이다. 내 영혼의 소재가 그것이다.

 

이제 이 생각을 다른 각도에서 상상해보려 한다.

 

수없이 많은 방들이 있는 아름답고 웅장한 저택을 상상해 본다. 나는 저택을 둘러싼 광대함을 모른 채 평생 동안 한 작은 방에서 살아왔다. 그 방은 편안하다. 

나는 그것을 나의 취향에 맞게 꾸몄고 그 벽들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어느 날 나는 문을 발견한다. 그 문 너머에는 복도가 있고 복도 너머에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방들이 이어진다. 갑자기 내가 살아왔던 작은 방이 너무나 작고 제한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저택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방은 내 인간 정체성이다. 저택은 내 영혼이며 그 문은 나의 몸 이상이고, 내 마음 이상이며, 이 일시적인 경험 이상이라는 '의식(consciousness)'이다.

 

일단 그 문을 열면, 내가 내 영혼의 광대함을 탐험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

 

어떻게 이 여정을 시작할까? 어떻게 인간 경험과의 동일시에서 영혼을 의식하는 것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질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삶의 감정들 · 투쟁들 · 승리들에 사로잡힐 때마다, 나 자신에게 물어보자.

'누가 이것을 경험하고 있는가?'

'이 생각들과 감정들 뒤에 있는 관찰자는 누구인가?'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할 때, 나는 영혼과 인간 경험 사이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영혼이 삶의 드라마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관찰자라는 것을 보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구속해 온 또 하나의 환상이 있다. 시간과 공간의 환상이다. 시간은 직선이 아닌, '원'으로 보인다. 과거 · 현재 ·  미래는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의 일부이다. 

안정적 시간의 개념은 마음의 구성물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조직하는 방법이지만 이는 현실을 인식하는 단 하나의 방법일 뿐이며 이는 나를 현실에 대한 제한된 이해에 가두어둔다.

 

잠시 기억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면,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때 그것은 어디에 존재하나? 그것은 나의 밖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내 인식을 통해 현재 순간으로 가져와지는 것이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무언가를 상상할 때, 나는 멀리 있고 먼 무언가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안에서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오직 내 마음속에만 존재하며, 그것들은 모두 같은 영원한 현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나 내가 접근할 수 있다.

 

철학자 쉐렌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은 뒤로 이해되지만 앞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반영하지만 또한 더 깊은 무언가를 가리킨다. 시간이 그 가장 진정한 의미에서 선형적이지 않다는 이해를 말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인식은 우리가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살도록 강요하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모든 시간에 접근할 수 있다. 만약 시간이 환상이라면 공간도 마찬가지다. 둘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가 풀리기 시작하면 다른 하나도 그렇게 된다. 공간은 시간처럼 우리가 외부의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간을 통해 움직이며, 우리가 마주치는 물체들 · 사람들 · 환경들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보면서 세상을 항해한다. 하지만 만약 공간이 시간처럼 저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양자물리학, 즉 현실의 가장 깊은 작동을 이해하려는 분야는 이미 공간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밝혀내기 시작했다. 아원자 수준에서 입자들은 동시에 하나 이상의 장소에 있을 수 있다. 그들은 공간적으로 얼마나 떨어져 있든, 즉각적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양자얽힘으로 알려진 이 현상은, 공간 자체의 직물이 우리가 한때 생각했던 것처럼 견고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대신, 우주의 모든 것은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단일한 통합된 의식의 장의 일부이다.

 

보이지 않는 힘들, 우리의 현실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이 있다. 이것들은 베일 뒤에서 작동하며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안내하고 영향을 미치며 현현시키는 힘들이다.

 

세계의 많은 영적 전통들이 이러한 힘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종종 상징적인 용어로 묘사된다. '천사들 · 영들 · 우주적 에너지들' · 또는 '신성한 법칙들'로...

 

하지만 이들이 가리키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내가 그것을 깨닫든 못 깨닫든 매순간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언가이다. 이러한 힘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본적인 진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주의 모든 것은 에너지다. 

현대 과학은 이것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는 고대 영적 전통들이 수천 년 동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진동하는 에너지이다.

 

가장 견고한 물체에서부터, 가장 추상적인 생각에 이르기까지, 내 몸은 에너지로 가득 차 있고 나의 생각들은 에너지이며 내 주변의 세계는 에너지이다. 모두 다른 주파수로 진동하며 견고함 분리 형태의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에너지의 춤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이러한 힘들은 존재에 수동적인 요소들이 아니다. 이러한 힘들은 현실의 건축가들이다.

 

힌두교에서 이 창조적인 힘을  '프라나(Prana)', 남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은 '마나(Mana)', 기독교에서는 '성령(聖靈)'으로, 일본에서는 '영기(靈氣), 도교에서는 '도(道)라고 부른다. 모든 것을 통해 흐르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흐름으로,  형태 없는 것을 형태로 가져오는 생명의 숨결로 말이다.

 

전통이 무엇이든 메시지는 같다. 보이지 않는 힘들이 모든 존재를 통해 움직이며, 그것을 형성하고 안내하며 생명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힘들이 나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나는 인간을 넘어선 존재로서, 어떻게 이 신성한 창조의 춤의 일부로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는, 내가 단순히 현실에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나는 공동창조자다. 내가 생각하는 모든 생각,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 내가 가지는 모든 의도는 존재의 캔버스 위의 붓놀림과 같다. 

나는 종종 그것을 깨닫지도 못한 채, 끊임없이 내 주변 세계를 형성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것이 의식의 힘이다.

 

창조하고, 현현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가져오는 힘이다.

 

점점 나의 생각과 감정이 내 주변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다.

 

불안을 느끼고 모든 것이 잘못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고, 기쁨을 느끼고 모든 것이 그저 쉽게 흘러가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힘들이 내가 발산하는 에너지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유사한 것은 유사한 것을 끌어당기고, 내가 세상에 투사하는 에너지는 경험 · 환경 · 사람들의 형태로 나에게 돌아왔다. 

이는 종종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불리지만 그것은 단지 대중적인 아이디어 이상이다. 그것은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원칙인 것이다.

 

많은 면에서 이는 카르마의 고대 개념을 반영한다. 내가 세상에 넣는 모든 행동 · 생각 · 의도가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파동을 만든다는 생각말이다.

 

하지만 카르마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이는 처벌이나 보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공명에 관한 것이다.

 

우주는 내가 존재하는 진동에 반응한다. 내가 창조자인 셈이다. 현실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보이지 않는 힘들과 공동창조자라면, 내가 인간 그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맞다! 그것은 내가 창조하는 힘이, 인간 경험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나의 몸, 나의 마음 심지어 내 삶의 환경에 의해 구속되지 않는다.

 

나는 별들을 형성하는 것과 같은 창조적인 힘들에 접근할 수 있다. 은하수를 탄생시키는 것과 같은 에너지들, 산들을 움직이고 바다를 휘젓는 것과 같은 힘에 말이다.

 

고대의 신비주의자들은 이것을 알았고, 그들은 이 힘에 접근하는 열쇠가 '고요함'에 있다고 가르쳤다.

 

성경에는 "잠잠하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임을 알라"고 쓰여 있다. 이는 단순히 마음을 조용히 하라는 부름이 아니다. 이는 창조 자체의 흐름으로 들어가라는 초대인 것이다. 모든 것을 통해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들을 의식하고 하나가 되라는 것이다. 

 

고요할 때, 마음의 끊임없는 잡담과 외부 세계의 산만함을 조용히 할 때, 이 흐름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현실을 형성하는 미묘한 에너지의 흐름을 느끼기 시작하고, 내가 그 흐름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고요함은 단지 시작일 뿐이다.

 

일단 창조의 흐름을 만졌다면, 다음 단계는 그것을 어떻게 지시하는지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의도가 작용한다.

나의 의도들은 보이지 않는 것, 즉 비옥한 토양에 심어진 씨앗과 같다. 명확성과 집중으로 의도를 가질 때 나는 우주에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힘들은 그 신뢰에 반응하고, 그 의도를 형태로 가져오기 위해 사건들 · 환경들 · 기회들을 정렬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현현의 본질이다. 형태 없는 것을 형태로 가져오는 예술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있다. 항복이다. 나는 우주와 함께 공동 창조자이지만, 작용하는 유일한 힘이 아니다. 현실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힘들은 그들 자신의 지혜, 그들 자신의 리듬, 그들 자신의 타이밍을 가지고 있다.

나의 의도들을 존재하도록 통제하거나 강요하려고 하는 것은 창조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저항하는 것이다.

 

대신 나의 의도들을 가볍게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지혜를 신뢰하고 흐름에 항복하는 것을 말이다. 이는 포기하거나 수동적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작용하는 더 큰 힘들과 자신을 정렬하고, 그 힘들이 나를 가장 높은 선을 향해 안내하도록 허용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이제 나의 진정한 무한한 자아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다.

 

내가 인간이 아니며 결코 그런 적도 없었다는 이 진실은, 해방적이지만 또한 도전적이다. 그것은 나에게, 나 자신, 나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세상에서의 내 위치에 대해 알았던 모든 것을 넘어서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광대한 미지의 것으로 들어가도록 초대한다. 그곳에서 자아의 한계는 녹아내리고 존재의 경계는 흐려진다. 

하지만 나의 무한한 자아를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나의 진정한 본질이 영원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한한 나의 본질은 시간이나 공간에 구속될 수 없다. 그것은 나의 몸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존재했고, 나의 물리적 형태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 개념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많은 영적 전통들이 영혼을, 내 존재의 영원한 측면으로 이야기한다. 힌두교에서 아트만은 영혼이다. 내 존재의 영원하고 변치 않는 핵심이다.

 

기독교에서 이 생각은 죽음을 너머 계속되는 불멸의 영혼에 대한 믿음에 반영된다. 심지어 현대 과학에서도 에너지는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는 개념이 이 진리를 반영한다. 

나의 본질은 영원한 에너지이다. 이동하고 변형하지만 결코 진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놓아야 한다. 죽음은 아마도 가장 위대한 스승일 것이다. 그것이 끝을 나타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 하나의 물리적 존재에 국한되어 있다는 환상의 직면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분리에 대한 자아의 믿음에 매달린다. 우리는 우리의 몸 · 우리의 성격 · 그리고 우리의 소유물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 당신이 몸이 아니고 마음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영원한 본질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죽음은 그 힘을 잃는다. 그것은 단순히 전환이 되는 것이다. 형태의 변화이지, 끝이 아닌 것이다.

 

나는 무한하고 시간을 초월하며 모든 창조의 신성한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 함께 오는 모든 도전 · 감정 · 경험들과 함께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이 역사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깊은 현존과 수용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 한다.

 

현재 순간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만나는 곳이다. 지금 이 순간, 나의 무한한 본성의 진실을 완전히 경험하면서도 인간의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다.

 

에크하르트톨레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에서 이 점을 강조한다. 그는 우리가 현재 순간에 완전히 항복할 때 자아가 녹아내리고 우리가 삶의 흐름과 하나가 된다고 가르친다. 

이 현존의 상태에서 우리는 더 이상 과거나 미래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마음의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개념이 아닌 직접적인 경험으로써 영원한 지금을 경험한다.

 

결국 이 여정은 인간의 경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내가 진정 누구인지, 광대함의 단 하나의 표현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나는  영원한 존재인 것이다.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 진실에 눈뜰 때 삶은 춤이 된다. 

유한한 것 안에서의 무한한 것의 아름다움을 펼쳐보이라!

그 춤 속에서 평안과  자유함, 그리고 내가 진정 누구인지 아는 것에 깊은 지속적인 기쁨을 발견하라~~~

 

당신이 무엇인가 되고 싶다면 당신의 생각을 그것과 일치시켜라!!!

인간이 그의 존재로 무엇을 숙고하든, 그는 숙고한 바로 그것이 된다~~~~~

그는 인간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신이기 때문이다.

 

⯎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지만, 잠재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가진 광대한 보이드(Void, 空)가 있다.

⯎ 의식과 에너지가 현실을 창조한다.

⯎ 신을 보라. 우리들은 잊혀진 신이다.

⯎ 우리의 목적은 미지의 것을 깨닫는 것이다.

 

“나는 신의 현현(顯顯)이다!”

https://keryssowin.tistory.com/entry/2%EC%9B%94%EC%9D%98-%EA%B0%95%EC%B6%94%EC%9C%84%EC%97%90-%ED%98%84%EC%B6%A9%EC%9B%90%EC%97%90%EC%84%9C-%EC%9E%A0%EC%8B%9C-%EA%B1%B7%EB%8B%A4-%ED%98%84%EC%B6%A9%EC%9B%90-%EA%B2%A8%EC%9A%B8%EC%8B%9C%E8%A9%A9

 

2월의 강추위에 현충원에서 잠시 걷다..., 현충원 겨울시(詩)

하늘 맑고 햇빛 밝아, 하늘 친구 & 해☀️ 친구, 잠시 얼굴 대면하러... 하던 일 뒤로하고 총총걸음 옮겨보니... 정말로 춥기는 한가 보다...❄️🥶 현충원에 사람 없네...😮    넓디 넓은 이

keryssowin.tistory.com

https://keryssowin.tistory.com/entry/2024-11-27-%EC%B2%AB%EB%88%88-%EC%98%A4%EB%8A%94-%EB%82%A0-%EB%AA%A9%ED%9A%8C%EC%9E%90-%EA%B0%80%EC%A0%95%EC%9D%98-%ED%96%89%EB%B3%B5%ED%95%9C-%ED%95%98%EB%A3%A8

 

2024. 11. 27. 첫눈 오는 날 목회자 가정의 행복한 하루, 현충원에서 입구 컷 당한 날

새벽부터 눈이 많이 내렸다. 세 식구가  새벽 기도회를 다녀왔다.책을 반납하기 위해  동작구작은도서관을 다녀오는데, '하염없이 내리는 눈'과 '이미 내려서 녹아버린 눈'이 섞여 통행에 많은

keryssowin.tistory.com

https://keryssowin.tistory.com/entry/%EB%B6%84%EC%A3%BC%ED%95%9C-%EC%9D%BC%EC%83%81%EC%9D%84-%EB%A7%88%EC%B9%98%EA%B3%A0-%EA%B5%AD%EB%A6%BD-%EC%84%9C%EC%9A%B8-%ED%98%84%EC%B6%A9%EC%9B%90%EC%97%90%EC%84%9C-%EC%9D%80%ED%96%89%EC%9E%8E-%EB%B9%84%EB%A5%BC-%EB%A7%9E%EB%8B%A4-%EB%82%B4-%EC%95%88%EC%9D%98-%EC%97%91%EC%8A%A4%ED%84%B0%EC%8B%9C%EB%A5%BC-%EC%B0%BE%EC%95%84%EC%84%9C%EB%A5%BC-%ED%86%B5%ED%95%B4-%EC%9D%B4%EC%9B%90%EB%A1%A0%EC%97%90-%EB%8C%80%ED%95%9C-%ED%81%B0-%EA%B9%A8%EB%8B%AC%EC%9D%8C%EC%9D%84-%EC%96%BB%EB%8B%A4-%EC%84%9C%EC%9A%B8%EB%8C%80-%EC%84%B1%ED%95%B4%EC%98%81%EA%B5%90%EC%88%98%EB%8B%98%EA%BB%98-%EA%B0%90%EC%82%AC%ED%95%9C-%EB%A7%88%EC%9D%8C%EC%9D%B4%EB%8B%A4

 

분주한 일상을 마치고, 국립 서울 현충원에서 은행잎 비를 맞다..., <내 안의 엑스터시를 찾아서>

분주한 월요일 아침을 열었다. 원로장로님 임원회의가 교회에서 있어서다.  사랑하는 우리 ♠♡장로님이 원로장로 회장직을 맡고 계셔서, 모든 회의와 간식과 식사를 준비하셔야 한다고 했다.

keryssowin.tistory.com

https://keryssowin.tistory.com/entry/%EA%B5%AD%EB%A6%BD-%EC%84%9C%EC%9A%B8-%ED%98%84%EC%B6%A9%EC%9B%90%EC%9D%84-%EA%B1%B7%EB%8B%A4-%EC%9D%B4%EA%B3%B3%EC%97%90%EC%84%9C-%EC%82%AC%EC%83%89%EC%9D%98-%EC%8B%9C%EA%B0%84%EC%9D%84-%EA%B0%96%EB%8A%94%EB%8B%A4

 

국립 서울 현충원을 걷다... 이곳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다가... 자신의 낡은 옷을 벗어 던지듯 잎사귀를 떨어뜨린다...겨울철을 대비해서 에너지를 절약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다... 가을이나 겨울 같은 건조한 시기에는 물이

keryssowin.tistory.com

https://keryssowin.tistory.com/entry/%EB%8F%99%EC%9E%91%EA%B5%AC-%EA%B5%AD%EB%A6%BD-%EC%84%9C%EC%9A%B8-%ED%98%84%EC%B6%A9%EC%9B%90%EC%9D%84-%EB%8B%A4%EB%85%80%EC%98%A4%EB%8B%A4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을 다녀오다..., 사색의 시간을 갖다...

분주하고 복잡한 요즈음,집 근처에서  하늘을 누리며 뻥 뚫린 공간을 누빌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몇 차례의 예배와 맡은 바 사역을 마무리하고 나면...  해가 뉘엿

keryssowin.tistory.com

 

반응형